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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Feb 25. 2016

영화관 나서는 길

영화를 보면 집에 가고 싶어진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길은 집으로 가는 길이어야 합니다.

어스름한 저녁해를 등지고 집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이따금씩 이 문장을 떠올린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길은 어떤 길일까. 장난감 사러 가는 길? 놀이공원 가는 길? 일 년에 몇 번 엄마, 아빠가 데려가는 그 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이들이 있었다. 매일 향하고 향해야만 하는 집. 지겹게 반복되는 집으로 가는 길목을 신이 나서 뛰어가고 싶도록 만들겠다고 한 건설회사는 말했었다. 브랜드 아파트가 붐을 이뤘던 2000년 중후반 그들의 광고 내레이션은 그렇게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첨단설비가 주는 편리함도 아름다운 스타의 이미지도 아닌 몇 시간 전에도 내 발이 닿았던 그곳을 주목했기에.


우리는 집을 나와서 집으로 들어간다. 눈감는 날까지 꼬박 평생을. 그래서 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면 그야말로 바랄게 없는 축복이 아닐 수 없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들이 만든 아파트에서 살지 않아서일까. 가방은 초등학생보다 훨씬 가벼운데 발걸음은 훨씬 무거웠다. 교과서가 빼곡히 들어찬 책가방도 아닌데, 어쩌면 지갑만 들어있는 돈가방이 전부인데, 어디 안 좋은 곳에라도 끌려가듯이 신발을 질질 끌며 세월아 내월아 걸었다. 갖가지 학원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시절엔 하루를 마친 것만으로 기쁘게 마침표를 찍었는데, 이제는 하루의 끝에서 오늘이 없다. 내일도 또 이 길을 걸어야겠지. 내일의 신세에 똑같은 푸념만 있다.


지하철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찍을 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 틈에서 얼른 빠져나와 바깥공기를 쐬고 싶은 게 다였다. 그거면 일단 살겠다 싶었다. 계단을 밟고 집 방향의 출구에 올라섰다. 눈 앞의 인도를 따라 쭉 걸어가면 되는데 이상하게 발이 나아가질 않았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희미해지더니 내가 갈 길은 엿가락처럼 있는 데로 늘어나 아득해 보였다. 채에 맞은 징이라도 된 듯 무거운 울림이 머릿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몸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거다. 집에 가기 싫다. 




어느 퇴근길에서 나는 집으로 가길 거부했다. 노곤한 몸, 지끈한 머리를 가지고서 집 말곤 딱히 갈 곳도 없는 주제에. 그래서 역과 연결된 쇼핑몰로 무작정 몸을 넣었다. 가운데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또 무작정 한 층씩 위로 올라갔다. 옷이 보이고 책이 보이고 식당이 보이고. 널찍한 공간이 눈에 들어와서야 멈췄다. 더 이상은 극장의 연속이니까. 평일 밤 혼자 찾은 극장의 모습은 생경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기면 주로 주말 오후에나 보러 왔으니 그땐 늘 북적였다.


가장 가까운 시간대의 표를 구매하고 재빠르게 착석했다. 한 시간 반이나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다니. 나의 시선도 남의 시선도 오로지 스크린만. 잡다한 카페 소음이 줄 수 없는 또 다른 개인적인 안락함. 이 시간에 상영되는 영화들은 비교적 인기가 없다. 영화관이 한산한 평일의 오전과 늦은 밤은 형평성을 고려한 작품들이 걸리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나에겐 잘됐다. 유명한 헐리웃 배우가 안 나오는 거대 자본이 투입되지 않은 어쩌면 로맨스, 보통의 드라마가 내 타입이니까. 그렇게 보게 된 영화는 내 신발처럼 잘 맞아 들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60대 할아버지와 10살 소년의 좌충우돌 우정 쌓기였다. 친구들에게 맞기 일쑤인 착한 꼬마는 도박을 일삼는 고약한 성질의 노인을 만나 한 방 먹이는 법을 배우고, 동네 사람들이 싫어하는 그와 어울리며 따뜻한 면모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아빠가 없고 자식이 없는 서로에게 결핍을 채워주며, 그들은 나이를 뛰어넘는 친구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자기 집 마당에서 선글라스와 헤드폰을 낀 채 일광욕을 즐기는 할아버지. 카메라는 나른한 오후 한때 흘러나오는 밥 딜런의 'shelter from the storm'을 한참 동안 따라 부르는 장면만 응시하다 끝을 낸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폭풍으로부터의 안식처. 두 사람의 존재가 쉴 곳이 되어준다. 우연히 찾아든 영화관이 나에겐 그랬다. 방황하는 발과 마음을 꼭 묶어 두었다. 안전하고 고요한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신고 있던 신발을 벗을 수 있었던 거 같다. 지난한 오늘들은 벗겨지지 않는 신발이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끈질기게 붙어있는 오늘의 잔해물. 더 무서운 건 내일도 모레도 같은 모양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래서 점점 걷기가 싫어진다는 것.




어쩌면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은 신발을 신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긋지긋해서 싫증난 내 신을 벗고 다양한 이들의 신발을 골라 신어 본다. 재벌가 상속녀로 값비싼 명품을 커피 마시듯 사보고, 훈훈한 뱀파이어가 되어 사람들을 홀려도 보고, 수시로 신분을 위조하는 첩보요원이 되어 일급비밀을 캐내기도 하고. 가상의 캐릭터와 그들이 겪는 흥미진진한 희로애락을 신고 우리는 극장을 나선다. 집으로 걸어가면서도 '개는 천벌을 받아야 돼, 나중에는 잘 살았을까.' 이야기의 여운을 챙기느라 바쁘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내 보폭은 넓어졌고, 속도는 느려졌다. 대신 걸음마다 안정감이 묻어났다. 까칠한 노인과 천진한 소년의 신발을 한 짝씩 신고 갔으니까. 며칠은 벗겨지지 않을 따스한 기운이 내 발을 감쌌으니까. 채 이십 분이 안 되는 집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에 대해 생각해봤다. 장난감도 놀이공원도 매력을 잃어버린지 오래, 어떤 길에서 나는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이 길이 아닐까. 


영화 한편에 오늘치의 시름과 규칙처럼 굳은 일과를 내려놓고, 기상천외한 일탈을 안고 돌아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을 지치지 않게 도와주는 길. 영화관을 나서는 이 길에서 나는 집으로 가고 싶어 졌다. 가벼운 걸음으로 집에 갈 수 있었다. 



그 날 내가 본 영화는 세인트 빈센트 (St. Vincent, 2014)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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