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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Feb 21. 2016

약해질 땐 자전거를 타

밟다 보면 나아가는 내 인생

열심히 안 해도 돼. 열심히 하지 마. 한동안 이런 주문을 외우고 다닌 적이 있다.

처음 들어간 직장의 면접에서 채용을 결정짓고 60대 초반의 회사 대표는 내게 말했다.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하라고. 그는 회사에서 제일 답이 없는 사람으로 "열심히만 하는 사람"을 꼽았다. 열심히 하는 데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화가 난다고 했다. 


그 주문을 너무 열심히 외웠던 탓일까. 남들은 하찮게 여길 일들이 나에게는 전혀 하찮지가 못했다.


지하철을 2번이나 잘못 타서 한참 늦은 시간에야 출장 장소에 도착했던 날, 접대용 음료를 사기 위해 가까운 슈퍼에 들렀더니 주문한 음료만 똑 떨어졌던 날, 번호를 잘못 눌러 엉뚱한 자리로 전화를 돌린 날. 

이 같은 날이 선물처럼 쏟아지던 나날들.


머피의 법칙은 신입의 법칙에 해당되는 것인지, 모든 사소한 실수와 불행들은 팔짱을 끼고서 나의 틈을 노리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던 어느 금요일, 나는 작정을 하고 넋두리 대상의 집 근처로 퇴근을 했다.

혼자 테이블을 차지해도 미안하지 않을 적당히 손님이 없는 작은 선술집. 그곳에서 소주 한 병을 들이키고, 한 병 더를 외치며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느새 내 앞자리에 앉은 그에게 나는 모래시계를 돌려 폭포수처럼 내 안의 모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선배,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일이 원래 이렇게 많은 거야? 최선은 최상급이잔아. 노력의 최상급."

"근데?" 선배는 딱 한마디로 대꾸했다. 


"그럼 아무 힘도 들이지 않는 일도 있어야 하잖아. 

왜 남들이 쉽게 하는 작은 일 조차 나한테는 쉬운 게 아닌 거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면 살아갈 수가 없잖아. 힘이 남아 있지 않은 걸.

선배는 또 묻기만 했다. "다 했어?"


"아니. 내 최선은 왜 인정이 안 되는 거야? 나 정량 초과야.

성공한 최선은 인정이 되고, 실패한 최선은 쳐다도 안 본다는 거. 나 잘 알아. 

근데 말야. 그건 누가 평가하는 거야?"


이후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음날, 술을 한 모금도 입에 안 댄 선배는 우리 집까지 운전을 해서 나란 짐을 하역했다고 문자로 전해왔다.


고된 수송으로 나를 피하던 그는 몇 주 뒤 주말, 호출 신호를 보냈다.



                             편한 차림으로 잠실역 앞에 서 있을 것. 신분증 꼭 챙겨 오기 바람.



카드 목걸이에 신분증까지 넣고 빈손으로 달려간 나와 달리, 선배는 두둑한 배낭을 메고 있었다. 뭐 할 거냐고 묻는 나를 끌고서 자전거 대여소로 향한 그는 두 발 짐승 2대를 더 끌고 나와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잠실대교에서 출발해 청담대교를 건너고, 성수대교에서 멈출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전거를 세운 뒤 선배가 가져온 물로 목을 축이며 벤치에 앉았다.




이윽고 선배는 입을 열었다. "그날 말이야. 너 꼭 버려진 자전거 같았던 거 알아?

타이어도 빵빵하고 체인도 잘 돌아가는데 설 생각을 안 해. 그래서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가질 않지.


나는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자전거를 왜 좋아하냐면 말야. 자전거만큼 정직한 게 없거든. 

페달을 멈추지 않는 이상 자전거는 절대 서는 법이 없어. 나만 멈춰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초라한 날에도 자전거에 타면 나는 어디로든 쌩쌩 앞을 향해 나가더라."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나를 등지고 서서 한강을 마주한 채 그는 말을 이어갔다.


"후배야, 자전거 타는 거 어렵니? 사는 게 어려우면 그냥 자전거를 탄다고 생각해.

누가 뭐래도 너는 페달만 밟아. 밟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선배와의 첫 한강 라이딩을 즐긴 지 벌써 삼사 년이 지나간다. 그 사이 구직도 여러 번, 최선의 정량 초과도 여러 번 있었다.


내가 사는 모양에 의구심이 비추는 날이면 가끔씩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있다. 찬 공기를 정면으로 맞으며 앞으로 가는 나를 보고 있자면 아직 어디든 갈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초조함 없이 잘 밟히는 페달은 원하는 곳으로 나를 안내할 등대의 불빛처럼 따스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브레이크만 잡지 않는다면 아무도 나를 막을 순 없다.


눈 앞에 보이는 오르막길도.

더 밟다 보면 파리의 쎄느 강변도 달려 볼 수 있지 않을까란 기이한 전의도 생긴다.


몸으로 배운건 잊히지 않는다고 했던가. 부딪치고 까지면서 9살부터 타게 된 두발 자전거를 내 몸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은 강해질 수밖에 없는 동물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축적된 시간들만큼 학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일 테니 말이다. 결국 약한 사람의 운명이란 태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각자에게 맞는 강해지는 방법을 찾는 여정으로 인생을 채워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전거를 탈 때마다 나는 조금 더 생긴 힘과 조금 더 강해진 나를 느낀다.


선배에게 뜬금없는 문자를 한 통 넣어본다. "밟고 있는데 아직도 모르겠어. 선배" 

보내자마자 도착한 그의 답장. "아직 더 밟아."


그렇다. 내 자전거가 달려가고 있는 이 길은 아직 몰 알기엔 턱없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멈춰있는 나보다 페달을 밟는 내가 훨씬 근사하다고. 나는 죽을 때까지 근사해져 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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