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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Feb 18. 2016

잘 듣고 싶다

청자만 되지 말 것

아는 분 딸은 '자유'다. 친숙한 말이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 불러보고 싶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듣고 '예쁘다, 특이하다.'가 아닌 '불러보고 싶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이름의 주인공보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부러워진 건 참 뜻밖의 감정이었다.


늘 갈망하면서도 '행복'이나 '꿈'만큼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이 없기에, 한 자 한 자 목청껏 질러내기만 해도 속이 후련해질 거 같아서. 좋아하는 가치를 매일매일 말할 수 있다는 자체가 아름답고 귀해서.  

그렇게 나는 자유가 이름으로 쓰였단 사실에 흠뻑 도취됐다. 


"자유야, 자유야." 하루에도 수십 번 부르면서 그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무 많이 불러서 단어가 주는 의미에는 이제 약간의 감흥도 느끼지 못할까. 6살 유치원생 아이는 아직 자유라는 낱말을 알지 못할 테니까 재민이나 수진이처럼 그냥 친구들 이름과 다름없을 것이다. 자유를 부르고 들으며 살아갈 모녀. 떠올리기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자유를 본 적도 없는 내 입에 걸린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작명에 대한 관념도 극명하게 변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 이름을 스스로 지을 수 없는 현실이 억울하기도 했었고, 그럴 수 있다면 누구보다 재빠르게 이름을 바꾸겠노라 했을 사람인데, 이름은 역시 가장 많이 부를 사람이 짓는 게 맞는 것 같다. 이름의 주인은 자신의 이름을 부를 일이 별로 없을 테니까. 살면서 나를 수없이 외칠 사람들이 지어주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이치라고 말이다. 



한순간에 화자의 입장에 서게 된 나. 신기하고 당혹스럽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못난 청자였으니까. 아직도 못난 습성이 다 사라진 건 아니니까.


무뚝뚝한 나와 정반대인 사람. 수줍고 부끄러워 손발이 오그라드는 나를 대신해서 달콤한 말을 살벌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처럼 언제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말과 행동으로 나를 놀라게 하는 사람. 나의 방망이를 맞고도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다시 고개를 내미는 두더지 같은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원했고,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난 무분별한 씀씀이로 파산을 맞이했다.


"가끔 넌 나를 신용카드로 생각하는 거 같아.

저금해 둔 것도 없으면서 갖은 애정표현은 다 받아 가잔아.

처음엔 괜찮았어. 한도 없이 너에게 내 마음을 주는 게 골드카드가 된 거처럼

줄 때마다 내 쓸모를 인정받는 거 같아서 즐거웠어.

근데 나는 원래 체크카드였나 봐.

니가 쌓아논 만큼만 나한테서 가져갔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으니까 내가 꼭 너한테 받을 빚이 있는 사람처럼 굴게 되잖아."


그의 심정도 이해는 가고 나의 단점도 얼마는 시인했지만 내 성격을 안다는 사람이 사랑을 돈처럼 계산하려 드는 거 같아 나는 차갑게 굳어서 말했었다. 식어버린 감정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고. 넌 나를 그만큼만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말은 하라고 있는 걸까, 듣기 위해 있는 걸까.

듣고 싶은 말은 이름과 같은 게 아닐까.

내가 부르지 않으면 나도 불리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불러도 상대가 날 호명해 주지 않으면 기운이 빠진다. 내 이름이 잊혀지는것 같아서 슬퍼진다. 

그래서 나를 열심히 불러 줄 다른 누군가를 찾아 떠난다. 그는 그렇게 떠났을 것이다.



"놀러 한 번 와. 밥 같이 먹게." 멀지 않은 거리에 사는 자취생이라는 이유로 나는 자유네 집에 식사초대를 받았다. 어느 주말 오후 맛있는 밥 한 끼와 소꿉놀이 시간을 평화롭게 맞바꾸게 된 것이다. 된장찌개 냄새가 폴폴 풍기는 점심을 먹고 나자 두 아이는 나이순서대로 낮잠에 빠졌다.


"요즘 많이 힘드시죠." 안부를 묻는 내게 자유 어머니는 이런 말을 하셨다.

둘째가 태어나서 기뻤지만 두 배로 힘에 겨운 것도 사실이라고. 하루는 어디가 불편한지 계속 울어대는 둘째를 안아서 달래고 있었는데,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잘 놀던 자유가 갑자기 울어버렸단다. 울다 깨다를 반복하는 둘째 덕분에 몇 일밤을 잠도 못 자서 피곤한데, 양쪽에서 울음을 터뜨리니 어찌할 줄을 모르겠더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울었는데, 울던 자유가 눈물을 멈췄단다. 그리고 다가와서 "엄마, 울지 마." 하고 자신을 안아줬단다.


위로의 말을 남편도 친구도 아닌 아이에게 듣게 되다니. 집안에만 갇혀 지내며 육아 스트레스를 겪는 자신에게 '자유'를 주고 싶은 '자유'가 안긴 건 아닐까, 쑥쑥 커서 손을 빠져나갈 자유가 엄마에게 주는 첫 번째 자유의 신호탄인 것 같다는 이야기. 그 놀라운 엄마의 해석 능력이 나는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정말 그랬을 테니까. 


혼자선 목도 가누지 못하고,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망울만 뽐내는 시절부터 자유는 들어왔다. 크고 작은 엄마의 소리를. 어느 시점에선 제일 많이 들려오는 소리가 자신의 이름이란 것도 알게 됐다. 할 수 있는 말과 들리는 말이 늘어나게 되면서 자유는 의문을 품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왜 말을 많이 하는지. 엄마도 듣고 싶어 하는 건 아닌지.' 엄마의 우는 모습을 처음 보고서 '이때'라고 느꼈을지 모른다. 말하기만 했던 엄마에게 들려줘야 할 차례라고.


어쩌면 6살 자유가 나도 몰랐던 청자의 덕목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들을 자격은 말할 용기를 가진 이들만이 얻게 되는 것이란 걸.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머리로만 공부한 나는 '완전한 화자도 완전한 청자도 없다.'는 것을 몸으론 이해하지 못했다. 대화가 원활하게 흘러가려면 화자는 수시로 청자가 돼야 한다. 그런데 나는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말만 들으려 했다.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며 청자의 입장만 고수했다. 


내가 듣기 좋아한 말은 상대도 듣기 좋아한 말일 텐데. 나와 가까운 사이의 누군가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면 의심을 해봐야 한다. 이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이 있구나. 이런 말이 듣고 싶어서 나에게 먼저 건네는 거구나. 훌륭한 청자란 듣기만 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찾아낸다. 나는 그저 듣기만 했으니 제대로 된 청자 노릇도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영어 듣기 평가는 시험지에서만 이뤄지지만 국어 듣기 평가는 늘 이뤄진다. 나를 제외한 한 사람만 더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평가 환경이 조성되니까. 잘 듣는 것도 듣고 싶은 말을 듣는 것도 큰 노력이 필요한 것이란 걸 깨닫는다. 화려한 '말발'로 모르는 사람을 사로잡았다면, 그 사람을 오래도록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속 깊은 '귀발'이아닐까. 


잘 듣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오래오래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잘 듣고 싶다.

더 이상 대화 상대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나는 잘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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