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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Feb 10. 2016

거짓말 그다음

거짓말이 주는 진짜의 찬스 

책 소개를 하는 프로그램에서 삐삐를 재발견했다. 

동화나라 스웨덴 지부 왕비 아스트리드 린드 그렌의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에서 어리지만 당찬 여자아이는 말한다. "거짓말은 나빠. 하지만 난 가끔씩 그 사실을 까먹지 뭐니" 천역덕스럽게 거짓말을 하고선 바로 잘못을 시인해버리는 대책 없는 귀여움에 난 푹 빠져버렸다. 

부모 없이 혼자 사는 아홉 살이 밝고 명랑할 수 있는 데에는 고집과 상상력으로 일군 자신만의 세계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의견이 모아지는 가운데 한 패널은 말했다. 자신의 딸이 그렇게 될까 봐 염려스럽다고. 


빨간 머리에 주근깨는 앤과 같지만 역시 삐삐는 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한 아이인 걸까.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누르고 나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내 머릿속 형광펜은 삐삐의 대사에 밑줄을 긋기 바빴고,

이내 거짓말의 근원지를 찾아 회상의 배를 탔다. 

내 생애 첫 번째 거짓말은 여덟 살 때 등장했다. 삐삐보다도 한 살 어린.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1학년, 처음 받아본 생일 초대장을 여는 순간 판도라의 상자는 그 개봉을 예고한 듯 싶다.

반 아이들이 한 두 명씩 생일을 맞아가면서 학용품을 포장해서 친구네 집으로 가는 날은 많아졌다. 8개의 초를 꽂은 케익과 고깔모자, 형형색색의 풍선은 아기자기한 꽃다발 속에 들어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길고 긴 상에 차려진 김밥, 치킨, 불고기, 과일 등의 푸짐한 음식. 그리고 빠질 수 없는 선물 증정식까지. 여덟 살 꼬마는 생일파티라는 황홀한 문화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내 생일은 8월인데 그전에 방학을 하면 친구들도 못 만나고, 그럼 선물도 못 받잖아.' 여름방학이 다가올 시기가 되자 나는 매우 불안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하교시간에 한 아이는 내게 생일이 언제냐고 물었고 몇 초 간 망설이다 나는 답했다.

나 오늘이 생일이야.


순간의 발언에 친구들은 그럼 오늘 생일파티를 하는 거냐며, 언제 너네 집으로 갈까라는 질문을 해왔다.

겁 없이 던진 '내 생일이 오늘'이란 말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고, 나는 반드시 '오늘' 생일을 치러내야만 했다.


아이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다니고 있던 피아노 학원으로 달려가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일을 나가는 엄마가 집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 다행히 엄마는 집에 있었다. "최대한 빨리 생일 상 좀 차려줘. 나 오늘 생일 꼭 해야 돼." 몇 시간 뒤까지 오면 된다고 친구들에게 말하면서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전속력으로 집에 뛰어가서 해피버스데이를 도화지에 적고, 과자를 접시에 담으면서 부실하지만 열심히 생일을 준비했다. 그렇게 8월 2일에 태어난 나는 7월의 어느 날 생일케익을 잘랐다.





최초의 거짓말은 성공적이었다. 가짜 생일이 진짜 생일이 됐으니까.

어찌 됐든 그 당시 나는 내가 아이들에게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서 동분서주했고, 엄마의 어시스트로 인해 거짓말을 멋지게 현실로 만들었으니 한골을 제대로 넣은 셈이다.


결과가 좋다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을 꾸며 말한 행동이 잘했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인격이 형성되어 가는 시기에는 더욱 옳은 가치를 쫓는 습관이 중요해 지므로.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 나는 어쩐지 그 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내가 아쉽게 느껴진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하는 거짓말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yes or no.

이거 다 처리했습니까? (안됐지만) 네. 배고파요? (고프지만) 아니요. 주말에 시간 있어? (있지만) 없어.


며칠 전 저녁에도 "밥은 먹었고?"로 시작하는 엄마의 전화에 나는 가짜 예스를 외쳤다. 이런저런 안부를 묻더니 엄마는 뜬금없이 "치우천황을 들어봤느냐"고 운을 뗐다. "처음 들어보는데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얼마 전 어떤 분이 <환단고기>를 읽어 봤냐고 물었단다. 엄마는 삼국지 같은 것인 줄 알고 무심코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엄마가 꼭 그 책에 나오는 치우천황 같다고 하셨단다. 내가 모른다고 하자 엄마는 "도서관에 그 책을 빌리러 가야겠다."고 했다. 다음에 그분이 또 물어보면 아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이다. 


하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알려줄 테니 괜히 먼 걸음 하지 말라고 통화를 마쳤다. 다음날 검색과 요약에 상당 시간을 쏟은 뒤 엄마에게 그림 한 장과 함께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환단고기는 고조선 시대 이전을 다룬 우리나라 고역사 책이야. 환인, 황웅 들어봤지? 치우천황은 그 환웅의 14대 직계손자래. 치우가 원래 이름이고 천황은 광개토태왕처럼 붙은 거야. 중국 신화에도 나오는데 머리는 구리와 쇠로 돼있고, 여섯 개의 팔과 네 개의 눈을 가졌대. 그만큼 싸움을 잘하는 무적의 존재!"


모전여전인가. 그러고 보니 가짜 생일을 치르고 크게 혼이 난 기억이 없다. 모르는 책을 읽어봤다는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엄마는 그 책을 읽으려 했다. '하지 않은 일'을 '한 일'로 만들려 했다. 선 거짓말 후 수습. 나는 거짓말  그다음에 방점을 찍고 싶다. 어쩌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노력하고 싶지 않아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사실대로 책을 읽지 않았다고 했다면 책을 빌릴 이유가 없다. 읽은 사람이 말해줄 테고, 거짓말을 했다는 꺼림칙한 기분도 들지 않을 테니까.


거짓말에는 배짱과 용기가 필요하다. 남을 속이고도 전혀 개의치 않아하거나, 거짓을 진실로 만들려고 노력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두둑한 담력이 나는 몸과 마음의 행동으로 나타났으면 좋겠다. 이 수고가 아까워서 이분법의 선택지에서만 거짓말을 고르진 않았을까. 만성적인 예.아니오는 상대가 듣고 싶어 하거나 내가 편한 답. '밥을 먹었냐'는 질문에 '몇 분 전에 막대과자를 몇 개 먹었더니 아직 배가 고프지 않다'는 조금은 장황하고 긴 답변을 하는 성의도 나는 보이기가 싫은 것이다. 그렇다고 '먹었다'고 거짓 답을 하고서 먹지 않은 사실을 먹은 것으로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다. 


인상적이었던 한 연예인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지금은 알만한 방송인인 그녀는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과거의 거짓말 덕분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었다. "곧 뉴욕으로 떠날 거야." 방송을 시작했지만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20대 초반의 그녀는 지인들에게 홀연히 이런 말을 던졌다. 돈도 계획도 없었지만 몇 달 뒤 그녀는 진짜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자신이 한 말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가게 된 곳에서 동양인 모델로 패션쇼에 서는 경험을 했다. 무모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큰 무대에 서는 영광도 얻어 볼 수 없지 않았을까. 




영화 <바닐라 스카이>는 "1분마다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찾아온다."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어쩌면 거짓말을 할 때마다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찬스가 찾아오는 건 아닐까. 구체적일수록 많은 이에게 알릴수록 더 좋다. 어쩔 수 없이 안간힘을 쥐어짤 테니까. "나 두 달 뒤에 혼자 일본으로 여행 간다."

그 말을 뱉은 순간부터 나는 입을 거 안 입고 먹을 거 안 먹고 없는 돈을 쪼개서라도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할지 모른다. 단 며칠이라도 누추한 숙소에서 메론빵만 먹어야 한대도 분명 '떠난 나'는 '떠나지 않는 나'와 다를 것이다. 거짓말을 지킨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내가 느끼지 못한 희열을 느낄 수 있으리라.


아주 가끔 재미있는 거짓말 하나, 괜찮지 않을까. 두 달 뒤 진짜 도쿄행 비행기에 내가 앉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설사 두 달이 지나더라도 나는 나 홀로 일본 여행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니까. 내 안의 잠든 삐삐를 깨워야 하는 이유, 난 썩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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