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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Feb 03. 2016

그녀의 울타리

친구의 울타리를 넘다 느낀 것

순식간에 일어난 접촉사고. 작은 외상 하나 없지만 후유증은 상당하다. 접촉부위가 뻣뻣하게 굳었고, 저릿한 느낌은 아직도 남아있다. 한동안 내 마음은 이런 증상들로 고생을 호소했다. 친구와의 보이지 않는 충돌을 겪었고, 지금은 그 사고를 언급하지도 않지만 나는 그 과실이 나에게 있음을 인정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십 년을 바라보는 고등학교 친구 S. 서로 다른 지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날 잡고 몇 시간 통화는 해도 만나는 날은 1년에 한 번이 될까 말까. 어려운 상봉의 자리를 갖게 된 우리는 보람찬 하루 계획을 세우느라 고심했다. 일단 대학로에서 연극을 한 편 보고, 밥을 먹고 나서 가볍게 과일주도 한 잔만 하자. 문화적 견문과 허기짐, 돌보지 못한 우정까지도 모두 가득 채워주리라.


최근에 아이돌 가수 누구가 너무 잘생겼더라, 남의 돈을 번다는 게 어렵다 어렵다 해도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우리 고등학생 때 공부 좀 더할 걸. 쉴 새 없이 장르를 오가며 털었던 수다의 종착역은 연애. 역시 연애다. 피 끓는 이십 대 후반의 청춘은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옳다.  


"만나는 사람 있다더니 자세히 얘기 좀 해봐." 썸을 타는 사람이 있다는 나의 고백에 갖은 공격을 하던 그녀가  내 말에 갑자기 조용해졌다. 전화로는 좋다, 요즘 핑크핑크하다며 자신의 근황을 신이 나서 떠들더니 아무 말도 않는다. 늘 빨간 그녀의 양볼이 어쩐지 까매 보인다. 테이블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침내 S는 입을 열었다.


"나 사실 연하 만난다." 나는 깔깔 웃으며, 그녀의 등을 한대 치고는 말했다.

"너 이 자식, 조용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이야, 이런 날이 오네. 이런 날이 다 와"


그런 게 아니라며 작은 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그녀.

"군대 간대. 곧." 입이 떡 벌어진 나는 재빠르게 나이 계산에 들어갔다. 

"그럼 몇 살이야?  한 대여섯 살 차이나나? 이십 대 초반인 거냐."며 수선을 떨다가 그녀의 생각을 더 들어 보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설득시킬 근거가 그녀에게 충분히 있는지 변론의 기회를 준 것이다. 이미 내 답은 뻔히 보였으니까.


만난 지 반년도 안됐지만 너무 사랑한다는 그녀. 여태껏 자신에게 이렇게 잘 해준 사람은 없었다면서 이대로는 못 헤어지겠단다. 가끔은 철이 없어 보여도 자신이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데이트를 하면서도 장난기 넘치는 그 애의 모습에 웃음이 난단다. 같이 할 미래를 꿈꿔보기도 한단다.

 

나는 S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 상황이 '진짜로 믿어야 되는지' 어이가 없었고, 그 연하남이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미웠다.


"우리 스무 살 아니잖아, 아니 그 스무 살도 고무신 거꾸로 신는 애들이 허다해. 

너 좋다는 사람, 네가 좋아할 사람 분명 있어. 훨씬 많을 수 있어.

얼마 만나지도 않아서 사랑이라고 느낀 그 감정, 다른 사람한테도 그 정도 시간 주면 똑같이 생길지 몰라.

2년이 이틀이야? 그렇게 쉽게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리고 기다려서 결혼이라도 할 거야?  

언제? 언제 대학 졸업하고, 언제 직장 잡고 대체 언제?  그동안 니 시간은, 니 나이는 아깝지도 않아?

개가 기다리는 거 빼고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뭐야?

더 깊어지기 전에 끝내는 게 맞다고 봐."


일부러 더 독한 말을 던졌다. 그렇게 자극이라도 받아서 그녀가 끝으로 내몰리면 어찌할 수 없이 내 말을 들어주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니가 뭔데? 

내가 너한테 답을 달라고 했어? 아니잖아.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어.

너한테 이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나 지금 많이 불쾌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S는 싸늘히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땡이라고 쳐주지 않으면 풀려나지 않을 얼음에 갇힌 것처럼 얼어붙어 버렸다. 한 번도 얼굴을 붉힌 적이 없던 우리였는데, 늘 웃는 상의 그녀였기에 정색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나는 니가 뭔데라는 네 글자가 그렇게 무서운 말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잔잔한 밀물 같았던 그녀와의 십 년에서 삽시간 들이닥친 거대한 파도는 안 그래도 작은 내 키를 훌쩍 넘어 사납게 소리쳤다. 당장 나가라고. 숨이 막혀도 나갈 수가 없었다. 파도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나가버리면, 그녀의 바다에서 나는 불필요한 존재란 걸 인정하게 돼버리는 꼴이니까. 또 진짜 S에게 나는 한 알의 모래보다도 해준 게 없으면 어쩌나 싶어서 겁이 나기도 했으니까.


이게 다 그 연하남 때문이야. 있지도 않았던 선이 나와 그녀를 가른 것도 모자라 화라고는 내본 적 없는 S가 직접 내 살에 자를 대고 선을 긋게 하다니. 찬물을 끼얹은 건 내가 맞는 거 같은데 얼굴도 모를 꼬맹이에게 화가 나서 사과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나는 결국 불편한 마음으로 그날 그 자리를 얼른 빠져나왔다. 니가 뭔데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향했던 수많은 물음표들이 이제 나를 찌르기 시작했다. 정체를 밝히라고 심문하듯 옥죄어 왔다.

나는 누구냐고. 

나는 그녀에게 누구냐고.

나는 그녀의 '누구'라서 '그녀의 연애'에 함부로 칼을 들이 미냐고.


어릴 때부터 나는 직선적이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었다. 특히 내 사람들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더 분명하게 호불호를 피력했다. 속마음에 반하는 말과 행동은 하기 싫어하는 나인걸 내 주변인들은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점이 매력이라고 했으니 그들에게 거침없이 기분 나쁠 말을 건네고도 작은 가책도 느끼지 못했을 테다.


어느 책에서 친구를 나뭇잎에 비유한 글을 본 적이 있다.

'활엽수 같은 친구는 겨울이면 떨어져 나가지만, 침엽수 같은 친구는 가끔 찌르긴 해도 언제나 붙어 있다'


어쩌면 나는 침엽수의 사명으로 이기심을 숨겨 왔는지 모른다.

아무리 찔리는 것에 익숙하대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덜 아프고, 더 아프고의 차이만 있겠지.

당장의 내 기분과 생각에 충실하느라 늘 내 곁에서 모진 말들을 담담하게 견뎌준 사람들을 헤아리지 못했다. 이 시점에 이르러 내 잎에 내가 찔리고 나니 아주 많이 아프단 걸 느낀다. S도 그랬겠지.  





그리고 나는 S의 울타리를 넘으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람은 각자의 금지구역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나를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기보다  '어디쯤에 얼마나 말 못 할 구역이 있으려나'하며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가족이라도 친구라도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그 누구라도 넘지 말아야 하는 곳과 지켜야 할 선은 있다.  


현재 S의 연애사는 내가 침범해선 안 되는 영토였고, 그녀의 구역에서 나는 '이 구역의 주인은 나'인양 명령했다. 헤어지라고. 그녀도 내가 자신을 위해서 한 말이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S는 혹시 내가 그녀 편에 서주진 않을까 하고 기대를 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심정은 조금도 알아주지 않고서 '헤어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길게 직언했다. 그것도 그녀가 지금 제일 듣기 싫은 말들만 골라서.


그녀가 한 번 더 나에게 '니가 뭔데'라고 물어온다면, <좋은 사람>의 가사처럼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그녀의 연하남도 좋은 건 아니다.


앞으로 S가 힘들고 어려운 길을 제 발로 찾아 나선다 해도 전처럼 그녀의 울타리를 마음대로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S는 자신이 믿는 대로 결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도 지는 어른이 됐으니까. 서로 틀렸다고 지우개로 지워줄 수 있는 고등학생이 우리는 더 이상 아닐 테니까. 그녀와 나는 자기가 택한 몫의 삶을 달게 살아가는 것이 맞겠지. 누군가 우리를 보고 속이 터져라 다른 길을 가라 해도 말이다. 


이제 나는 조금 과묵해지기로 했다.

그저 S의 울타리 너머로 아름다운 꽃이 드리우길 바라 주는 것.

그녀의 곁을 지키는 호위무사가 되어 울타리를 서성이는 것.

친구인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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