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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Feb 01. 2016

취향의 단종

단종된 음료 한 잔에도 나는 분노한다

"고구마 음료 한 잔 주세요" 주문을 받은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뒤를 돌아 메뉴판을 훑더니 이내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메뉴에 없는데 다른 음료로 주문하시겠어요?" 얼마 전까지도 먹었는데 무슨 소리예요! 가 본능적으로 튀어나왔지만 예의를 갖추고 물어봤다. "다시 한 번 살펴봐 주시겠어요?"


이번엔 점장으로 보이는 다른 직원이 카운터로 다가와 말했다. "그 음료는 단종됐어요."  

"저는 참 좋아했는데..."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을까.  


"근데 왜요?" "네?" "왜 단종됐어요?" 

내입으로 말해놓고도 순식간에 민망함이 몰려오는 질문을 해버렸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하다니. 이건 1 더하기 1은 왜 2냐고 묻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인기가 없으니까 사라진 것이다.


부끄러움에 나는 재빨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길을 걸으며 다짐했다. 내가 다시 이 카페에 오나 봐라.

처음엔 단순히 흥! 하는 심술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단종 소식을 전했던 곳은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 중 하나이다. 

수많은 점포들이 유동인구가 활발한 거리에 위치한 만큼 안정된 수익성을 유지할 것이다. 누구나가 접근이 용이한 그곳에 들어서면 최소 한 잔은 시키게 돼있으니 보다 많은 선택권을 주는 것이 유리하다. 그래야 혹시모를 이탈 고객마저 잡아둘 수 있을 테니까. 


다양한 메뉴는 1명의 고객도 잃지 않겠다는 그들의 치밀한 마케팅 결과이자, 잠재된 1명을 끌어들이기 위한 묘안도 된다. 그래서 매 시즌마다 새롭고 이상하기까지 한 음료를 출시하며 특이한 입맛의 사람들까지도 포섭하려 드는 것이다. 그것이 수익의 일부를 꾸준히 메뉴 개발에 투자하기 때문에 가능한 프랜차이즈의 강점이다.


'메뉴가 많다'는 그 이익 논리가 마음에 들기도 했었다. 

고구마를 사용한 따뜻한 라떼를 판매하는 곳은 많지만, 상대적으로 차가운 고구마 음료를 만나는 것은 힘든 현실. 헌데 내가 방문한 카페에선 만날 수가 있었다. 등장만으로 나를 사로잡으며, 오로지 그 음료를 먹기 위해 수두룩한 카페들을 제치고 먼 걸음을 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귀한 만큼 맛있었으니까. 


나는 동전의 양면을 알아채지 못했다.

'메뉴의 다양성'은  메뉴가 '사라질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신메뉴를 정기적으로 내놓는단 사실을 감안하면 한 브랜드가 시장에 등장한 이례 메뉴의 수는 어마 무시해야 맞다. 하지만 대형 카페들은 대부분 50~70개 사이의 평균적인 음료 메뉴 개수를 꾸준하게 유지한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음료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음료는 방출되는 덕분에.


기업의 입장도 이해는 한다. 한 음료를 만들기 위한 재료의 상시 대기에는 보이지 않는 유지-관리비용 및 제조비 지출까지 수반될 테니, 잘 팔리지 않는 음료를 안고 있는 것은 손실일 것이다. '선택'과 '집중'은 보다 많은 이들에게 맛있는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명분과 보다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실리를 구현한다.

  

선택받지 못한 음료는.

선택받지 못한 음료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대로 괜찮을까 아니 이대로 괜찮아해도 되는 걸까.


퇴짜 아닌 퇴짜를 맞은 그날, 나는 보란 듯이 길 건너편의 다른 카페에 가서 카페모카를 마시며 생각했다.



열에 일곱은 아메리카노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 형상이 겹쳤다.

인형 속에 인형이 들어있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Matryoshka)를 처음 보았을 때엔 귀엽고 신기해서 탄성이 나왔지만, 어쩐지 열고 또 열어도 똑같은 모습의 인형이 들어있는 게 섬뜩하기도 했다. 나는 일곱의 사람들이 그렇게 느껴졌다.


저 사람들 속에는 다 똑같은 아메리카노가 들어있을 것이다.

안경을 낀 교복 입은 남학생도, 오렌지 컬러의 머리를 하나로 묶은 20대 여성도, 양복을 입고 한 손에 서류가방을 든 중년의 남성도. 레귤러냐 라지냐, 컵 사이즈만 다를 뿐 모두 한 음료를 몸에 넣고 있다.


마트료시카 밑에 'made in 러시아'가 쓰여있다면, 저들의 밑엔 'made in 카페 이름'이 써있지 않을까.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를 다른 누군가, 또 다른 누군가도 함께 좋아하는 건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많은 이들이 한 가지를 선호할 수 있는 데에는 가격, 맛 이외에 개인적 취향도 있겠지만, '메뉴판에 있어야 한다'는 필연적이면서 석연치 않은 큰 전제조건도 있다. 이 조건이 나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메뉴판에 없는 것은 원할 수 없으며, 나아가 좋아할 수도 없다는 것.

그러고 보니 메뉴판을 짜는 이들이 특정 음료를 마시고 좋아하도록 카페에 들어선 사람들을 조종하고, 인형으로 만들어서 내보내는 광경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지켜보는 나조차 즐겨 마시던 고구마 음료를 다신 찾지 못하도록 제어된 다른 인형이었다.

  


'팔리지 않아서 슬픈 건, 잊혀지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음료 한 잔을 먹지 못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취향을 잃어버려 슬픈 것이다.


취향이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을 뜻한다면 내 음식취향은 고구마로 통한다. '고구마 덕후'라 불러도 될 정도로 고구마에 대한 나의 사랑은 대단하다. 익힌 건 말할 것도 없이 달짝지근한 고구마 맛탕, 고구마가 들어간 빵, 고구마 아이스크림. 심지어 닭갈비를 먹어도 닭고기보다 고구마를 골라 먹기 바쁘다. 그러던 어느 날 전에 없던 형태의 것이 찾아왔다. 시.원.한. 고구마 음료. 


목이 메이지 않는 고구마 맛을 느끼고 싶었던 내 갈망을 제대로 저격한 것이다. 

살짝살짝 씹히는 얼음의 시원함에 섞인 원재료 특유의 은근한 달달함, 스무디 느낌의 농도가 주는 부드러운 넘김. 맛도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고구마의 세계를 넓혀준 것도 좋았다. 좋아하는 것이 하나 더 늘어서 좋았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행히도 내 취향은 다수에 들지 못했으니까. 


참 신기하게도 그 메뉴가 단종됐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나의 미각 취향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알게 됐다.

나는 소수자였다. 찬 고구마 음료를 좋아하는 소수자.


우리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크는 동안 일정 교육도 받고 세상의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개인의 취향을 형성해 나간다. 하나 둘 모인 취향들은 어느 시점에선가 안정되고 단단한 그 사람만의 고유한 형태를 만든다. "이래서 이건 마음에 들고, 저건 저래서 별로야" 나이를 먹으며 뚜렷해진 취향은 크게 늘어나기도, 그 방향이 바뀌기도 힘들어진다. 오랜 시간 나와 함께 해온 성격과 가치관처럼 떼어낼 수 없는 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니까 나의 축소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옷장을 열어보니 코트보다 점퍼가 많다면 '좀 더 편하고 활동성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나'가 옷걸이에 걸려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좋하는 것을 발견하고, 마음껏 좋은 감정을 느끼며 또 그것을 소중히 여기려고 노력하는 것은 성장판이 닺친 후부터 더 중요해지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한낮 고구마 음료'라고 치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보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소비자의 신분으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단종된 음료 하나에도 내가 단종된 것처럼 나는 분노하는 것이다. 

변하는 것은 없다는 걸 잘 알지만, 내 단종된 취향 하나에 대한 예의를 정성껏 다하고 싶다.   



취향의 미래에 대해 나는 감히 '블록 인간'이란 동화를 적어본다.


블록 인간을 쌓고 있는 다양한 색과 크기의 블록들. 처음에 한두 개를 잃어버리면 티도 안 나서 눈치도 못 챈다. 하지만 10개, 20개 점점 빈자리가 많이 보이기 시작하면 생각한다. "어쩌지. 이렇게 많이 없으면 나를 지탱할 수가 없는데." 그리고 나선 자신에게 맞는 블록을 찾는데 걸리는 시간과 비용을 가늠해 보고 결심한다. 

"가게에서 파는 블록을 사야겠다." 대량 생산된 블록을 몸에 넣고 다니다 남들을 보며 흠짓흠짓 놀랜다. 

"어라, 저 사람도 나와 같은 블록을 샀네" 몇 개의 블록만 같을 뿐이라며 자신의 모습에 만족해한다.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한 사람을 보고 발라당 뒤로 쓰러진다. "분명 저 사람은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 모습과 한치의 오차도 없는 판박이인가." 몸속에 박힌 블록들을 빼내려 하지만 단단하게 굳어서 잘 빠지지 않는다. 

블록 인간은 자신에게 어울릴 블록을 직접 찾지 않고 산 것을 크게 후회하며, 행여나 똑같은 사람을 또 만날까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과연 먼 훗날 내가 저 블록 인간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나도 모르게 잃어버린 취향을 남들의 취향으로 메꾸다 본래 내가 좋아하던 것들은 기억하지 못한 채 쓸쓸히 관으로 들어가는 결말. 나는 맞이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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