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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Jan 27. 2016

사랑을 알려준 선생님

아홉 살 인생을 지켜준 한 사람 

코끝과 손발이 차가워지는 계절이 오면 편지를 읽는다. 

마음의 온도를 높여 온 몸 곳곳에 산소가 공급될 수 있도록.

입김이 나오는 날씨에 냉정한 현실마저 나를 관통하면 보호기제인 편지를 찾는 것이다. 인간은 추우면 따뜻함을 찾게 되어 있는 존재니까.


누구나가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겠지만 나한테는 유독 각별하다.


자취방이 2번이나 바뀌는 동안 수많은 가구와 물건들이 나의 간택을 받지 못했지만, 편지 꾸러미 만큼은 늘 일 순위로 새 보금자리에 안착했다. 그 배경에는 보내는 사람의 지분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것에 있다. 

바로 나의 2학년 담임선생님이다.




9살 꼬맹이 때와 지금의 내 모습은 겉도 속도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 선생님은 이십 대 후반으로 자란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막연히 생각해왔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내 앞에 선생님이 나타난대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연갈색의 짧은 머리에 뽀글뽀글한 파마, 뽀얀 피부에 웃으실 때마다 보였던 고른 치아. 단아한 미인상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손도 참 작으셨는데, 따뜻한 그 손바닥이 더 작은 내 손을 폭 감싸기도 했다.


몇 년에 한 번씩 운이 좋은 날엔 선생님이 꿈에 나오곤 한다. 이렇게나 변한 나와 달리 선생님은 하나도 변한 게 없는 모습으로. 하지만 나는 변할 수 없어서 슬프기도 했다. 새로운 기억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나이를 알려주신 적은 없지만 나를 가르치고 몇 년 뒤에 정년퇴직을 하셨고, 손자 둘의 할머니 직함도 이미 달고 계셨으니까. 


잘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는 한 번도 선생님을 찾아간 적이 없던 것일까.



어릴 때  받은 상장들을 보면 2학년 상징이 가장 많다. 웅변대회, 발명대회, 사생대회, 글짓기...대회란 대회는 다 나갔었다. 그리고 몇몇 상장의 발행인은 선생님이셨다. 예쁜 그림과 함께 자필로 적힌 글귀가 있는 상장, 행여 구겨질까 나는 코팅까지 했었다.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다. 상을 받지 못해 섭섭해할 제자를 위해 자신이 직접 상을 만드는 사람. 너희는 너희로 충분히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걸, 눈빛 몸짓 태도로 늘 말하셨다.



한 번은 일기장에 지금조차 꺼내기 힘든 말을 썼던 적이 있다. 엄마가 집을 나가셨다는 이야기. 선생님은 점심시간에 나를 부르시곤 아무 말씀도 없이 꼭 안아주기만 하셨다. 그 품안에서 밥을 먹고 있는 아이들일랑은 상관도 않은 채 펑펑 울었다. 꽁꽁 언 얼음판에 혼자 서있는데 따뜻한 빛이 날 감싸는 거 같았다. 이제 추워 말라고. 아무 걱정도 말라고. 그 존재감에 안도하며 나는 평범한 '아홉 살 인생'에 열심히 참가할 수 있었다. 





"제발 3학년에도 제 담임선생님이 되어 주세요" 1년이 끝나갈 때쯤 선생님을 다시 볼 수 없단 생각에 울고 떼를 쓰며 매달리기도 했다. 학교를 마치고 학원에 가서도 울고 있는 날이 계속되자 엄마는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고, 그리하여 내 눈물을 그치기 위한 빵집 회동을 어두운 밤에 갖게 돼었으니. 결국 선생님은 타협안을 내놓으셨다. 

선생님이 다니는 교회에 오면 일요일마다 만날 수 있다고. 


그래서 종교가 없던 집에서 자란 나는 주일마다 교회에 다니게 됐다. 그 후로 3년 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교회에 갔다. 집사님인 선생님을 보기 위해서. 일요일 아침마다 댁으로 찾아가면 선생님 부부와 함께 차를 타고 교회로 향했다. 일찍 도착해 놀이터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면 베란다에서 손짓을 하며 나를 부르셨다. "안으로 들어와. 내 제자" 그럼 난 신이 나서 제 집 소파 인양 앉아 과자를 먹었다. 그 소중한 일요일 풍경을 오래도록 지속시키지 못한 게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가며 더 후회가 된다.


사춘기였을까. 새벽기도까지 다녔던 내가 6학년이 되면서부터 선생님을 볼 수 없게 된 게. 교회에 가지 않게 되면서 차츰 선생님은 희미해졌다. 또렷이 남은 건 선생님의 글씨뿐. 인형이나 사탕, 액자와 같은 조그만 선물을 자주 들고 가자 이제부턴 편지를 쓰라고 이르셨다. 그 덕에 선생님과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 편지들 중에는 따로 적어 지갑과 내 마음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어떤 구절이 있다.


 선생님은 늘 너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그러니 너는 예쁘고 착하게 크기만 하면 돼.
하늘에서도 니 행복을 빌어주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돼.


작은 것 하나 똑 부러지게 못하는 나를 보면서도, 내 어깨에만 무거운 짐이 있는 거 같이 느껴지는 날에도 때때로 나는 완벽하게 절망할 수가 없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한 사람은 있을 거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은 내가 믿는 최후의 보루가 되셨다. 힘든 순간마다 잡고 일어설 어깨를 아홉 살 때부터 내어주셨는데 나는 그 믿음으로 또 버텨봐야지 하며 살아왔는데. 


진짜 저 말처럼 선생님은 내 행복을 빌어주러 하늘로 가버리셨다. 몇 해 전 엄마의 지인분이 선생님과 같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서 조심스레 안부를 여쭤본 날. 그날부터 왜 야속하게도 선생님을 더 찾게 되는 것인지. 용서도 구해야 하고, 맛있는 음식도 사드려야 하고, 다이아몬드 게임도 다시 해보고 싶은데.

떳떳하게 '저 이렇게 컸어요' 하고 찾아 뵐 기약도 이젠 드릴 수가 없다. 


한없이 다정한 응원은 어떻게 나올 수 있던 것일까. 공부도 썩, 모하나 특별할 거 없이 눈에 띄지 않는 나를 특히나 예뻐해 주신데에는 일말의 까닭도 없었을까. 난 선생님이란 직업은 평생 가질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한 사람, 특히나 부모가 아닌 사람에게서 받았던 어린 날 사랑의 기억은 평생을 지배하는 것 같다. '받지 못한 사람은 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이성이 아닐지라도 타인, 나아가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어릴 적 자신에게 사랑을 베풀어준 한 어른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을까. 선생님이 나라는 민들레 홀씨를 볕이 잘 드는 '비옥한 사랑'에 인도해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게 하신 것처럼. 


그분이 나의 아홉 살에 나타나 주신 것이 나는 너무 감사하고 든든하다.

나 또한 어떤 아이의 인생에서 스쳐 지나가는 멋진 어른이 되어볼 수 있길. 가끔씩 꿈속에서 나를 만나 주시길.

나는 또 나를 위한 기도를 선생님께 드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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