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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Mar 08. 2016

마지막에 생기는 마음

못해도 괜찮은 면죄부

먹을 생각은 없었다. 이미 저녁밥도 먹었고, 양치질도 했으니까. 친구가 갈아입으라고 준 편한 옷도 입었겠다, 오락 프로 몇 개 보다가 밀린 얘기도 좀 하다가 졸리면 자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친구는 출출한지 뭐라도 먹어야겠다며 냉장고로 가더니 김치전을 해 먹잔다. 정말 생각이 없어서 단박에 거절했는데, 그럼 딱 한 장만 부칠 거라고 강조하더니 거듭 물었다. "먹어? 안 먹어? 진짜 안 먹어? 진짜 안 준다!"


사부작사부작 칼질하고 붓더니 어느새 촤-악 팬을 감싸는 소리. 고소한 기름 냄새. 접시에 가지런히 담긴 부침개를 들고 내 곁으로 온다. 작은 원룸이라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가장자리까지 바삭하게 노릇노릇 잘 구웠다. 적당히 붉은 게 고추까지 썰어 넣어 칼칼하니 맛있겠다. 호호 불며 한 조각 입에 넣는 걸 보고 있자니, 헤헤 한입 만. 정 없으니 두 입, 마지막으로 세 입. 야!! 친구는 빽하고 소리를 지른다. 넌 맨날 이런다고. 처음부터 말하면 좋지 않냐고. 왜 자꾸 세상에서 제일 짜증 나는 사람이 되려 하냐고.


나도 안다. 혼자 먹으려고 한 개만 끓인 라면을 달라고 하는 사람, 두 개 끓이는 것을 한사코 만류하더니 하나 끓인 걸 후회하게 만드는 사람, 가엽은 표정으로 먹는 걸 빤히 쳐다보는 사람, 주지 않으면 어쩐지 내가 나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사람, 그렇게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사람. 그런 사람을 사람들은 짜증 나지만 받아주고 있다는 걸.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왜 나는 끓이기 전에 말하지 않는 걸까. 다 익어서 식탁에 놓여야 왜 먹고 싶은 걸까. 

왜 그렇게 밖에는 먹을 수 없는 걸까.  


먹고 싶은 마음이 늦게 드는 건 단순히 생각이 늦어서는 아니었다. '그래야 더 맛있으니까'라는 고약한 심보도 아니었다. 미안했다. 그리고 언짢은 기분을 조금이라도 짧게 느꼈으면 했다. 먹는 건 두 사람인데 한 사람만 요리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고, 그런 기분을 일찍 느끼게 하는 것보단 구박받더라도 나중에 한 입만 달라고 하는 게 어쩐지 그들을 위해서도 좋을 거라는 생각. 그렇게 미안하면 안 먹으면 되는 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늦게라도 생긴 식욕은 외면 않고 성실히 채우는 게 나였다.



결정이 늦었다. 최대한 끌 수 있을 만큼 끌다가 닥쳐서야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바이올린을 배워볼 수 있었다. 방과 후 활동으로 바이올린 강습을 접수받는단 가정통신문을 나눠준 날. 어린 나도 악기 구입비용과 일주일 2번 레슨비가 적혀있던 그 종이가 쉽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피아노 학원처럼 '나 이거 할래' 하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엄마도 선뜻 '배워볼래' 권하지 않는다는 것도, 받자마자 내가 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았다. 마감날 아침이 돼서야 출근하기 직전의 엄마에게 말했었다. 여기에 사인 좀 해달라고.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 미안했다. 처음부터 배우고 싶어 하면 혹시라도 그렇지 못할 경우엔 엄마는 더 미안해할 거고, 나는 실망한 기분을 오래 느껴야 할 테니 학교 가기 몇 시간 전까지 말을 미룬 것이다. 그저 바이올린은 돈이 많이 드니까, 돈과 결부되면 사람은 주저하고 망설이니까, 나도 그 보통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고. 어릴 땐 그게 다인 줄 알았는데, 그런 종류의 것들에서만 결정이 늦는 것이라 여겼는데, 다른 상황이 오면 '이왕 할 거면 빠르게'가 될 거 같았는데. 그래도 결정은 늦었다.


딱 한번 나가본 공모전, 팀을 꾸려야 하는 자격조건이라 한 친구는 다른 친구와 나까지 셋이서 나가면 좋겠다 했고, 난 생각해보겠다 답했었다. 그리고 친구들 애간장을 태우다 신청 마감 하루 전날, 하겠다고 했다. 사실 공모전 소식은 친구가 말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대학생이면 한 번쯤은 나가봐야지, 재미도 있겠는데.' 왕성하진 않아도 제법 의욕이 일었지만 숨겼다. 하고자 하는 열의를 일찍 내보일수록 잘할 거란 기대가 커지니까, '저 정도 의지면, 중간은 할 거야.' 내 능력의 평균값을 상향 조정할 테니까. 나는 그게 두려웠던 거다. 그들이 생각하는 결과에 내가 미치지 못할까 봐, 가진 건 얼마 없으면서 욕심만 있다고 수군거릴까 봐서.


결정이 늦었다는 건 틀렸다. 나는 그런 척했던 것일 뿐이다.

관심 없는 척, 심드렁한 척, 탐탁지 않은 척, 귀찮은 척하다가 '마지막에야 마음이 생기지 뭐야.' 마무리 속임수.

내 마음 일부는 콩밭에 있으니 실수나 잘못, 저조한 성적, 예상치 못한 실패는 전혀 이상할 게 아니라고. 노력이나 재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의지가 약한 거라고 그 누군가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렇게 내 면죄부를 만들었다. 그랬음 편하게 즐겼어야지 그러지도 못하는 새가슴이면서.


얼마전에도 재미난 소모임을 그렇게 물건너 보냈다. "독서모임 만드는데 들어올래?" 지인은 알음알음으로 작은 모임을 만드니까 같이하자고 권했다. "글쎄, 그런 거 해본 적 없는데. 생각은 해볼게." 학교를 벗어나 일정한 목적으로 많은 이들이 함께하는 활동은 생소해서 답을 흐렸지만, 한편으론 지루한 일상에 유쾌한 시간이 될 거 같아 퍽 설레어 '하리라' 마음을 먹었었다. '아는 것도 없는데, 처음 보는 이들과 책에 대해 토론하다가 망신만 당하는 거 아냐.' 석연치 않은 구석이 발목을 잡아 "나 들어갈까?" 한참 뒤에 문자를 넣었더니, 지인은 시큰둥해하더니 어쩐 일이냐며 여덟 명 내외로 인원을 정해서 이미 다 구했단다. 어찌나 아쉽던지.


사실이지, 

누구보다 충만한 욕망 덩어리면서!

어쩌면 척해서 미안해야 할 대상은 그들이 아닐 것이다. 변명하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 나. 나한테 가장 미안해야 한다. 나태하고 무기력하다고 먼저 나를 얕잡아 봤으니.


나는 28cm 벼룩을 열심히 키운 건 아닐까. 

벼룩은 원래 60cm 이상 뛸 수 있는데, 30cm 유리컵에 가두면 그 안에서 계속 부딪치다 나중에는 28cm 정도만 뛰게 된다. 컵을 치워도 벼룩은 28cm 밖에는 뛰지 못한다. 


만화에서 봤던 저 벼룩이 나일지도 모른다. 잘할 수 있는 데에는 요만큼도 가능성을 걸지 않고, 조금 못할까 많이 못할까만 걱정했으니까. 멋지게 해낼 수 있는 일도 지레 겁을 먹고, '못해도 괜찮아, 늦게 시작했으니까.' 핑계를 만들어 과잉보호 해온 게 아닐까.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하려는 나를 제대로 믿어줬어야 했는데, 잘한다, 잘한다 기를 세워 주는 건 세상이 아니라 나부터였어야 했는데 말이다. 


똑바로 도착하지 못할 거 같아서, 엉뚱한 곳에 열차가 퍼지기라도 할까 나는 늘 마지막 열차를 탔던 거 같다. 선택의 기로에 놓이면 이제는 속시원히 첫 차를 타고 싶다. 일등으로 타서 부담감을 느끼기보다, 더 편안하게 갈 준비를 하고 앉아 바라는 행선지의 모습을 꿈꾸고 싶다. 능숙하지 못해 상심했던 나는 내리게 하고, '해 봐, 문제없어.' 첫 마음은 태워주기로 한다. 



벼룩이 등장한 만화는 광수생각 2 _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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