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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Mar 12. 2016

지금은 이상하고, 그때는 예뻤다

내 소유의 액자는 딱 하나 있다. 크기만큼 무거워서 자주 볼 수는 없다. 소유인은 나지만 소장인은 엄마이므로. 안 입는 옷들이나 쓰지 않는 잡동사니처럼 나의 오래된 유물이기 때문에 엄마의 관심 아래 집 한켠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지만, 나에겐 집에 내려갈 때만, 그것도 어쩌다 눈길을 돌릴 때 슬쩍 시야에 걸리는 정도의 존재감일 뿐.

 

액자는 내가 6학년 때부터 우리 집 벽에 걸려있게 됐다. 미술학원 전시회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어쩌면 내 생애 가장 잘 그린 그림이 들어있다. 액자 속 모든 게 그러하듯 파스텔로 그려진 정물화는 세월이 한참 흘러도 변함이 없다. 가루가 잘 날리는 재료의 특성상 픽사티브를 뿌려 한 번 코팅시키고, 유리까지 단단하게 눌러주니까 그림은 정말 그 속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잘 갇혀있다. 그린 사람은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데 말이다.


하얀 데이지가 큰 항아리에 가득 담긴 그림. 전시할 작품이라서 무얼 그릴지, 어떤 도구로 채색할지 오래 고민한 끝에 제일 자신 있는 걸 골랐고, 대회용 그림보다도 더 정성을 들였기에 완성됐을 땐 날아갈 듯 만족해했었다. 내가 그린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들고 다니며 자랑하고 싶을 만큼 '잘 그렸다' 생각했었다. 교복을 입게 되고 또 벗게 될 때 까지도 여전히 그림은 훌륭해 보였다. 자주 보면서도 보는 족족 매번 흐뭇해했는데, 어쩐지 볼기회가 줄어들면서는 점점 곱게 보이지가 않았다.



어라, 묘하게 분위기를 깨네. 하얀 꽃들과 잿빛 항아리가 대조를 이루면, 노란 배경이 따스하게 감싸 안아 안정감을 줬는데,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느낌은 뭐지. 이십 대 초반 문득 그렇게 느껴지더니, 다음번엔 보면 볼수록 거슬렸고, 또 그다음엔 '짜증나게 거슬려, 정말'까지 와버렸다. 


주먹보다 작은 크기의 꽃 두 덩이가 거슬림의 원인이었다. 보고 그렸던 원본엔 없던 것. 데이지만 꽂혀 있던 게 당시 내 눈엔 별로였는지 이름 모를 남보라색 꽃을 쓱싹 칠했는데, "이거 왜 그려 넣은 거야?" 선생님은 의아해하시며 물으셨다. "예뻐서 그렸는데요." 이미 그린걸 어쩌냐면서 넘어가시는데, 나는 그게 이상했다. 더 예쁘기만 했으니까. 탐탁지 못한 선생님이 더 의문스러웠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예쁘지가 않다. 푸른 꽃이 꼭 시퍼런 멍 자국 같다. 조화롭게 섞여서 오히려 밋밋한 분위기에 생기를 불어넣어 줬었는데, 역시 그려 넣기 잘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오점이 돼서 그림을 망치려 든다. 한동안 감쪽같이 안보이다가 서서히 명확하게 보인다니, 놀랍고 황당했다. 미적 취향이 바뀐 것도 아니요, 별스럽게 감식안이 생겨난 것도 아니니까. 지금은 너무 잘 보이는 게 그땐 왜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건지. 



선생님은 알았고, 그때 난 몰랐던 이유. 시간인 걸까. 지나야 만 보이는 게 있다던데, 이것도 그런 걸까. 어른이 돼야만 찾을 수 있는 숨은 그림 찾기. 어린 난 죽어도 찾을 수 없는 그림이 있다는 것. 그걸 알게 되고, 인정하는 게 어른이 되는 걸까. 그럼 난 어른되기가 싫은가 보다. 처음부터 안보였으면 끝까지 보이지 않는다거나, 보일 거였으면 진작 보였어야지. 지금 이상하면 그때도 이상하고, 지금 예쁘면 그때도 예뻤어야지. 이런 막무가내 일방통행이 하고 싶으니까. 푸른 꽃이 거슬리는 지금, 푸른 꽃이 한없이 잘 어울려 보였던 그때. 두 가지 사실을 공존시키기가 어렵다. 


나는 속이 상했다. 지금은 이상한 게 그때는 최선이었다는 것.

지금 이 거슬리는 걸 그려놓고, 그때 나는 너무 만족스러워했으니까.

그때 나를 지금 내가 초라하게 만드는 거 같아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어?' 친구들과 한 번쯤은 나눠본 얘기. 제일 예뻤던 열 살로 돌아가서 미모를 관리하겠단 친구. 고1 때로 가서 정신 차리고 공부할 거란 친구. 신입생 때로 가서 주야장천 여행 다니겠단 친구. 그들 틈에서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과거의 나한테 미안하다고. 되돌리게 되면 아무리 똑같이 행동한다 한들 그때의 내 모습은 잃어버리게 되는 거니까. 그럼 그 시간에 열심히 살았던 내가 부질없게 돼버리니까. 나는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서, 이상해진 그림을 그린 어린 나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라했다.


"지금 이상해 보이는 걸 그때도 알면 안 되는 거예요?" 그림 얘기를 듣더니 선배는 말했다. "그때도 알면 화가 됐게? 헤어질 거 알아도 너 사랑했잖아. 미리 알았으면 안 했을 거야?" 헉. 말문이 막혔다. 곧 나를 찡하게 하는 말을 덧붙였다. "그림 있잖아. 지금 이대로도 좋지 않을까? 그때 너의 최선으로 남겨두는 거. 니가 거슬려하는 그 꽃, 그게 니 최선이었다며. 그걸 그리지 않았으면, 그때 넌 최선을 다한 게 아니잖아."


선배는 꼭 과거의 나를 놓아주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액자 속 시간이 멈춰진 세상에서 살고 있는 그림. 그 시절 나의 손때와 생각, 마음이 생생하게 박제된 그림.

그림은 어설프고 풋풋한 나의 기록이다. 오래된 일기장처럼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 볼 수 있는. 하지만 지금은 손델 수 없는. 고치고 싶어도 고칠 수 없고, 고친데도 이미 그건 그때의 나와는 전혀 관계될 수 없는 이야기. 

미숙하지만 돌이킬 수 없어 더 아름다운 흔적.


난 최선을 다해 그렸고, 스스로 만족해했다. 그거면 된 거 아닐까. 그때도 예쁘고 지금도 예쁘길 바라는 것보단 순간순간 최선이길 바라는 것. 그 최선의 낱장들을 내가 기억하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닐까. 어쩌면 지금도 과거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면 그게 더 슬픈 걸지도 모르겠다.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단 거니까. 그땐 예쁜 게 지금에서 이상한 건 내가 어떤 의미로든 달라진 걸 뜻한다. 그러니 달라진 나를 만족시키는 건 현재의 내가 할 일이지, 과거의 나를 탓할일은 아닌 거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소망하고 싶지 않다. 몰랐던 '그때'가 쌓여서 지금 하나 더 알고 싶고, 둘 셋 계속해서 자꾸 더 많은 걸 알게 되고 싶다. 그때 난 몰랐어야 했다. 지금 알아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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