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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Jan 10. 2016

꼬임의 미학

사랑도 너와 나의 엉킴으로.

어느 일요일 오전, 구석에 다가선다. 방구석 구석.

냉장고 뒤의 좁은 틈에서 엄지 손가락보다 작은 진회색 먼지더미를 발견한다. 옷장과 책꽂이 사이의 벌어진 틈에서도 뭉쳐진 머리카락을 찾아낸다.


쓰레기통으로 투신하기 전 나는 성분이 다른 두 뭉치를 바닥에 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곧장 버리지 않고 관찰했던 어떠한 이유는 조금도 없으나 주말의 무료함이라고 하는 편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을 거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솔직히 더럽다는 생각보다 꽤 봐줄 만한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먼지 더미는 비오기 전 하늘의 뭉게구름을 조금 떼온 거 같았다. 작고 작아서 처음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던 먼지가 어느새 덩어리를 이루고 진회색 빛의 옷도 입고 있어서 썩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살벌하게 엉킨 머리 뭉치는 어깨가 조금 넘는 길이의 내 일자 머리칼들이 '참 역동적으로 움직였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마치 한올 한올의 개체들이 행위예술을 하고 있는 고귀한 현장에 내가 와 있기라도 한듯한 기분이었다.


부쩍 센치해진 나를 뒤로한 채 월요일 오전, 지하철을 기다리며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한 번도 꼬여있지 않은 적이 없던 이어폰 줄에 이제는 짜증내는 것도 잊었는데, 쉽게 풀리지 않자 가여워 보인 건 왜였는지. 휴대폰, 지갑, 파우치, 수첩 등으로 복잡한 가방 속에서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그 길고 긴 몸을 잘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해졌다. 다시 보니 힘 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 보다 꼬여있는 모습이 리드미컬하고 더 정감이 갔다. 그래서 꼬인 매듭을 한 번만 풀고는 그날은 짧아진 줄로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목요일쯤 되었을까, 잘 입던 셔츠의 세 번째 단추가 떨어졌다. 단추를 달기 위해 오랜만에 서랍 속에서 바느질 상자를 꺼냈다. 실은 가지런히 놓여있을 수 없는 존재인 건지 수북하게 제멋대로 엉켜있었고, 그 속에서 겨우 검은색 실을 찾아 단추를 달 수 있었다. 남은 실타래를 정리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서로 꼬여있는 게 아름답다. 풀고 싶지 않은걸."


아름답게 뭉쳐져 있는 것을 보면 풀고 싶지 않다. 정말 딱 그랬다.

가령 그 뭉치들이 무익하고 무의미할지라도.

누군가에게 심미적으로 행복함을 줬다면 그것이 존재가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일주일새 내 곁을 찾아왔던 각양각색 각기 다른 성격의 뭉치들. 몇 가지는 버려지고 또 몇 가지는 엉켜서 불편함을 주었지만 나는 잠깐이나마 예쁜 감상을 누렸던 것이 좋았다. 늘 그곳에 그 모습으로 있었는데 평소라면 이미 버려지고 풀려서 절대 내 눈에 밝히지 않았을 테지.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엉킨 실타래를 푸는 방법은 딱 두 가지뿐이라던 어느 책의 구절을 기억한다. 끝까지 풀거나 끊어버리거나. 

나는 후자였다. 눈에 보이는 것이건 보이지 않는 것이건 꼬여버린 것들은 쉬이 끊어 버리는 사람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꼬인 관계, 꼬인 감정은 조금도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부딪치고 싸우는 게 싫어서 여기까지 , 그럴 운명이었다고 여기까지. 

풀지 못할 거 같아서 풀다가 내가 버려질 거 같아서 그렇게 접어버린 관계들. 


시간이 지난 지금 사랑했던 사람도 우연히 다가온 인연도 아깝다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아마 상대와 내 감정을 똑바로 대적시켜 끝을 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드는 꼬임을 조금은 다르게 보고 싶다.


얽히고설켜서 풀리지 않는 꼬임의 사전적 의미는 '혼자이지 않음'을 수반한다. 절대로 혼자선 꼬일 수 없기에. 

꼬임의 가장 작은 단위는 너와 나. 그리고 너와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결국 꼬임일 것이다.

관계 속의 두 사람이 서로를 더 잘 알아가고 깊어지는 시간은 첫 번째 꼬임에서부터 비롯된 것일 테니 말이다.


어쩌면 꼬임은 숙명이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생기는 갖가지 꼬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껴안을 수 있는 게 

진정한 짝을 만나는 게 아닐까.


우리는 꼬이지 않기 위해서 애쓰기보다 아름답게 꼬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닐까.




문득 사랑하는 게 꼭 머리 땋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생머리도 이쁘지만 머리를 땋으면 왠지 모르게 더 발랄해 보인다. 땋은 머리가 소녀들의 전유물이란 말처럼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우리는 말랑말랑해진 감성으로 어린아이처럼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슬퍼하며 생기 넘치는 얼굴이 된다. 그 부드럽고 로맨틱한 마음가짐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양 갈래의 머리칼이 된다. 한가닥만으로는 땋기를 할 수 없듯 사랑도 혼자선 어렵다.  


머리를 땋기 시작할 때 양쪽의 머리칼은 비슷한 양으로 묶여야 서로가 서로를 받쳐서 잘 풀리지 않게 된다. 사랑하는 감정 또한 한쪽이 너무 크면 상대는 버거움을 느끼기에 적당히 균형을 이뤄야 오래갈 수 있다. 땋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한 번만 땋는 것은 의미가 없다. 머리 길이 만큼 끝까지 풍성하게 만들어진 꼬임이 바로 땋는 매력이기 때문이다. 연애를 시작한다면 '서로가 나눠 갖는 추억을 만들어 가자'는 것에 대한 동의가 이뤄진 것이다. 어렵고 힘든 순간들 조차도 쌓이고 쌓여 갈 때 그 자체로 두 사람만이 예쁘게 땋아온 사랑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잘 땋아진 머리를 고무줄로 묶듯 평생 한 사람만을 바라보겠다는 결혼서약을 한다.


내 마음의 '꼬임'을 풀어 '꼬임'을 부추기다니. 그야말로 숭고한 '꼬임'이다.

꼬일 것이 무서워서 손을 놓던 나하고는 이쯤에서 그만 작별을 고한다. 몇 가닥 땋을 수 없는 머리 길이지만 나는 이제 열렬히 꼬일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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