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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Feb 15. 2016

모든 게 아주 조금씩 어긋날 때

당연함에 길들여졌다는 신호

오늘은 중국음식 먹는 게 어떨까요. 점심시간 전 누군가의 한 마디. 그렇게 오늘은 '점심 뭐 먹지'가 1초 만에 뚝딱 결정됐다. 주문을 받아 적던 동료는 내게 "짜장면과 짬뽕을 시켜 나눠먹자"며 제안을 했고, 나는 흔쾌히 그

러노라 대답했다. 얼마 후 주문한 음식들이 먹음직스러운 모습으로 도착했다. 종이에 쌓인 나무젓가락을 뜯기만 하면 맛있는 식사가 시작될 터였다.


나무젓가락을 둘로 가르는 순간, 한쪽은 손잡이가 생기고 나머지 한쪽은 몽당연필이 돼버렸다.

여분으로 몇 개 더 온 젓가락을 찾아 이번엔 조심스럽게 양 손에 힘을 가했다. 그리고 나는 또 한번 종이 포장지를 찢어야 했다. 도합 세 번의 젓가락 뜯기. 모두 십일자를 이루지 못했기에, 그나마 한쪽이 덜 짧았던 두 번째 실패작으로 짜장면을 입에 넣었다. 





아.아.아.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 크고 작은 짜증의 감탄사. 되는 일이 없다며 한숨 쉬는 나를 지켜보던 한 분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하셨다."자기 오늘, 아주 조금 재수없는 날인가 보다." 아주 조금으로 끝나지 않을 거 같은 불길한 예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책 제목을 내가 보기 좋게 빗겨나가 주리라. 시간 앞에 감정이 그러하듯 퇴근이 가까워오자 오후의 불운했던 일은 점점 잊혀져 갔다.


퇴근을 한 시간 앞두고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회사 근처니까 끝나고 얼굴 좀 보자."

어느 건물 앞에서 몇 시까지 만나자는 답장을 보내고 약속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먼저 보자고 했던 사람은 나타날 생각이 없다. 날도 추운데 밖에서 친구를 기다리자니 일 분이 한 시간처럼 길었다. 휴대폰 시계를 주시한지 딱 13분 만에 걸어오는 그녀. 23분 늦었다면 30분으로 올림 해서 크게 화라도 내겠는데. 기다린 것도 기다리지 않은 것도 아닌 13분. 왜 이렇게 늦었냐고 하기엔 좀스럽고 째째해 보인다. 뻔뻔하게 미안하단 말도 건네지 않는 그녀를 향해 약간의 짜증도 못 내고 반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친구와 헤어진 길, 몇 주 전부터 사야겠다고 생각한 니트가 떠올랐다. 그래서 집 근처 백화점에 들러 옷 구경을 했다. 쇼핑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속좁다 느꼈던 나도 쓸 땐 쓰는 여자니까. 너무 얇지 않고 그렇다고 두껍지도 않은 코트 안에 받쳐 입기 좋을 옷. 적당한 두께의 와인빛 라운드 스웨터가 내 눈에 들어왔다. 거울 앞에서 옷을 대보니 괜찮게 어울렸다. 엄마의 의류 구매 철학에 따라 얼룩은 없는지, 그 어떤 조그마한 하자도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마침내 옷을 계산했다. 


집에 돌아와 잘 맞는지 한 번 입어봤다. 다행히 옷은 몸에 잘 맞는데, 오른쪽 소매 부분이 달갑지 않은 흔적을 가지고 있었다. 확인하고 또 확인했는데 나와있는 여러 개의 실 가닥. 가위로 잘라 내면 새 옷과 다름없는데 괜스레 찜찜한 이 기분. 그렇다고 교환하러 가기엔 귀찮다. 왜 문제없는 옷 한 벌을 사는 것도 나는 못하는 걸까. 내가 참 마뜩잖다. 미욱스러운 내 모습이 거북하다.


자의건 타의건 개운하게 끝나지 못한 일련의 사건들에 나는 상당히 짜증이 치밀었다. 시원하게 화를 낼 결정적이고 명쾌한 근거가 없으니까. 증오하고 벌을 주기엔 입은 피해가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이니까. 긁어 부스럼이라더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짝짝이 젓가락이 화낼 수 없는 13분이 튀어나온 실밥이 나를 괴롭혔다.


친구에게 보낸 생일 축하 문자는 하루빨리 보내 버렸고

열심히 뛰어 왔더니 눈 앞에서 버스는 떠나가고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이 쏟아져 손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삼각김밥의 포장을 뜯다가 김과 밥이 분리되고

책장을 넘기다 종이에 손을 베이고

계란 프라이를 하려고 달걀을 깼는데 껍질 조각도 함께 들어가 있고

빨래를 널려고 보니 양말 한 짝이 보이지 않고


어찌 보면 사는데 지장 없는 하찮고 시시한 일들. '그런가 보다, 그럴 수 있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들.

하지만 그 만만하고 영양가 없는 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속상할 때가 있다. 제법 많다.


내가 지원했던 학교에 떨어지고, 들어가고 싶어 한 회사 면접에 낙방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외면하는 건 괜찮다.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고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영향을 끼칠 일들이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런 크고 중요한 일들은 자 없이 일직선을 똑바로 긋는 것처럼 많은 훈련과 시간, 운도 따라 줘야 하니까. 그렇지만 소소하고 자잘한 일들은 눈 깜짝할 새 찍히는 점처럼 하나 사면 하나 더 따라오는 덤처럼 부지불식간에 쫓아와 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공평하고 세상사는 맛도 생기니까. 이런 생각이 든다.




인생은 아주 까다로운 손님 같다.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걸 싫어하는 비위 맞추기 힘든 손님.

지퍼가 달린 옷을 입으면 좋으련만 인생은 자꾸 단추가 달린 옷만 입으려고 하는 듯하다.

그의 옷장엔 처음부터 단추가 없는 옷 같은 건 걸려있지 않았나 보다.

의복의 혁명을 일으킨 지퍼의 발명에도 그는 오로지 핸드메이드 단추만을 고집한다.


한번 맞물린 지퍼의 아귀를 쭉 당기면 깔끔하게 채워지는 편리함은 단추에겐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다.

단추는 그 개수마다 손의 수고로움을 요한다. 쓱싹 한 번이면 완벽한 옷 매무새를 선보이는 지퍼와 달리 단추는 늘 불완전하게 잘못 채울 가능성을 안고 산다. 첫 번째 구멍을 보지 못하고, 두 번째 구멍에 첫 번째 단추를 끼워  넣는다거나 가끔씩은 건너뛰는 단추도 발생한다.





플라스틱이나 금속 같은 튼튼하고 견고한 재질인 지퍼와 비교되게 단추는 한없이 얇은 실에 자신의 생명을 맡긴다. 잘 입고 나서 옷을 벗을 땐 조심히 단추를 풀지 않으면 그만 똑하고 떨어져 버린다. 그리고 간혹 잘 있다가 갑자기 떨어져서 우리를 곤욕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문득 떨어진 교복 단추를 달아주며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등교시간을 앞두고 연신 빨리빨리를 외치던 나에게 엄마는 말했었다. "단추는 고양이가 달아주는 줄 아니."

아주 짧은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고 '단추쯤은 금방 다는 거 아니냐'며 엄마를 재촉했던 나였다.

이제 내가 단추를 달아보니 알 것 같다. 옷에 어울릴 색깔의 실을 고르고, 그 실을 바늘구멍에 끼워 넣는 일. 떨어지지 않게 여러 번 구멍을 교차시키고, 적당한 지점에서 매듭을 묶은 뒤 깔끔하게 남은 실을 자르는 일.


단추를 단다는 건 분명 시간도 오래 걸리고 손도 많이 가는 일이다. 바늘에 단추를 꿰는 것 조차 힘이 든데 단추를 다는 일은 말해서 무엇할까. 비단 단추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 쓰레기통에 휴지를 던져 넣는 일도 방향을 조금만 잘못 맞추면 들어가지 않는 법이니까. 


그 어떤 일도 '원래 그런 일'은 없는데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잘 되는 게 맞는 일'을 늘려온 게 아닐까.

어떤 일에 내가 감사했던 적이 있던가. '잘 된 일'은 마땅히 여기고, '잘 되지 않은 일'은 불만을 품었으니 따지고 보면 난 감사한 적이 없던 것 같다.


어쩌면 결점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는 건 모든 게 아주 조금씩 어긋난다는 건 내가 오만해졌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허투루 대한 일은 언젠가 자신을 '쉽게 봤다'며 내 앞에 바나나 껍질을 던지고 도망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난 왜 내가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야 하냐며 화를 내고 '엎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일'도 감사해야 할 일이란 걸 깨닫겠지.


당연하지 않은 게 당연한 것처럼.  

몇 시간 뒤면 까먹을 나와 나를 둘러싼 작고 사소한 움직임에도 

감사하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모든 일에 물음표와 느낌표를 붙이는 성의를 보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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