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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Feb 28. 2016

다섯에 한 번은 거절하기

조금 더 같이 걷고 싶으니까

머리가 핑핑 도는 거 같고

점심 먹은 게 얹힌 건지 속은 덥수룩.

여자는 남자에게 데리러 오면 안 되겠냐고

문자를 보냅니다.

"나 체한 거 같아. 오늘 집에 태워주면 안 돼?"


남자가 도착하려면 두 시간은 걸릴 테니

카페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한 시간도 안돼서 두둑한 봉지를 들고 등장한 남자.


"어떻게 된 거야?"

놀라서 여자가 묻자

"급한 일 생겼다고 삼십 분 일찍 나왔어.

소화제 종류 별로 다 사 왔으니까

회사에 뒀다가 또 속 안 좋으면 바로 챙겨 먹어."


소화제를 먹이고 남자는

조그만 반짇고리 상자를 꺼냅니다.

크고 못생긴 손으로 3cm는 될까 싶은 바늘을 들고서 

여자의 엄지에 피가 통하지 않도록 실을 감더니, 

아악 여자의 비명과 함께 검붉은 핏방울이 맺히자 흡족해합니다.


따가움도 잠시 남자가 귀엽고 기특해서

"근데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아까 약사면서 약국 아주머니한테 배웠어.

여자친구가 체했는데 손 따는 방법 좀 알려 주실 수 있냐고.

편의점에서 바느질 도구 산거는 차에 둬야겠다.

너 언제 체할지 모르니까.

내가 그때마다 시원하게 따줄게."


속이 좀 진정되자 여자는 물 만난 고기처럼 하루를 들려줍니다.

"나 오늘 힘들었다.

팀장님한테도 깨지고 배달 도시락이 왔는데

내가 싫어하는 생선까스가 온 거야.

안 먹고 덩그러니 남길 수도 없어서 

몇 입 먹었는데 결국 속이 알았나 봐.

내가 몹시 짜증 난 상태로 먹고 있다는 걸."


누가 조금만 속상하게 해도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칠 수 있는


새벽 2시에 호떡이 먹고 싶다고 하면

직접 호떡을 만들어 올 거 같은


우연찮게 발이라도 밟혔다간 무서운 눈빛으로 

사과를 받아내고 말 거 같은


기린은 원래 날개가 있었다고 하면

진짜 그랬었냐고 믿을 거 같은 



흐뭇한 상상을 하던 여자는 순식간에 철렁 마음이 내려앉습니다. 


"내가 어떤 부탁을 하면 말이야.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거라도

다섯에 한 번은 안된다고 거절해야 돼. 알았지?"


남자는 이해가 안 가서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억지 부리고 떼쓰는 여자들, 정말 꼴불견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 식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거 너무 유치하잖아.

그런데 오늘 그 여자들이 왜 그러는지 알 거 같아.

나도 그러진 않을까 걱정이 돼. 두려워."


사랑스러워 죽겠는 여자를 보며 

"알았어, 다섯에 한 번은 꼭 못하겠다고 할게."


남자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나도 막무가내 주문을 들어주는 남자들 참 별로였거든.

여자친구가 절대 신이라도 된 듯 모시는 거

남자 망신은 다 시킨다고 생각했어.


근데 널 만나고 나선 그 남자들 되게 행복했겠다 싶은 거야.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란 거 

믿고 의지하는 존재가 된다는 거니까.          

네가 당연한 듯 날 찾는 게

나는 점점 괜찮은 놈이 돼가는 거 같아서 좋아."

 


한 발 물러나 서로를 헤아리고

한 발 더 가까워짐을 느끼면서

같이 걷는 이 길이 조금 더 늘어났음을 깨닫는 두 사람.


날 사랑하니까 이렇게 해줘, 널 사랑하니까 그렇게 할게

말고 우린 사랑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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