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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스티스 Jul 16. 2022

문이 두번 부서진 날, 나는 향을 피웠다

단단해져야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

아찔한 아침이었다.


여느 아침처럼 아이가 잠에서 깨자 거실로 내려가 아침을 준비했다. 이날 아침 메뉴는 마트에서 사온 시나몬 롤과 우유였다. 공산품 빵을 질색하는 남편이 출장을 떠난 사이 신나게 주문한 빵이었다. 이유식 의자에 아이를 앉히고 한 손에 우유컵을 쥐어주고 나서 곧바로 현관문으로 향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배달된 신문을 집어들었다. 해외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로망이었던 뉴욕타임스를 구독하기 시작했고 잘 몰라도 매일 아침 신문을 읽는 건 하루의 즐거움이었다.


이날은 아니었다. 신문을 집어 올리며 건너편 이웃과 눈인사를 나눈 뒤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돌려봐도 손잡이는 돌아가지 않았다. 미국집은 한국에서처럼 문이 닫히면 자동으로 잠기는 번호키가 아닌 열쇠를 쓴다. 문이 닫힌다고 잠길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나는 더 당황했다.


창문을 확인해보니 의자에 앉아 두리번거리는 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서둘러 방법을 찾아야했다. 길 건너편에 이웃 두분이 여전히 아침 수다를 떨고 계셨다.


“굿모닝”

“굿모닝...”


결코 좋은 아침은 아니었지만 일단 인사를 나누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분께서 전화를 빌려주셨고 출장 중인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멀리 있는 남편이 해줄  있는 일은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주는 일이 최선이었다. 집주인은 연락이 닿지 않았고, 출장열쇠는 한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창문 안을 다시 들여다보니 아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엉엉 울고 있었다. 멀리서봐도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   보였다. 이웃들은 창문을 부수자며 집에 있는 남편들을 불러오겠다고 했다. 창문을 부수게 되면 한동안 남편이 자리를 비운 집에 창문을 열어놓은채 지내야하는데 선뜻 내키지 않았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커질수록 더 초조해졌다. 그러나 잠옷 바람으로 발만 동동 구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전화기 너머로 차고 옆문을 부수라며 소리치는 남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온 힘을 다해 문을 걷어찼다. 옆문은 비교적 얇은 나무 문이라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차고 안으로 뛰어들어가보니 집안으로 통하는 문이 잠겨있었던 것이다. 나는 결국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결국 경찰을 불렀다. 경찰은 심심찮게 겪어본 일인듯 대수롭지 않게 현관문을 부숴놓고 돌아갔다. 그렇게 문밖을 나온 지 30분 만에 모녀 상봉을 했다.


아이를 안아 달래고 식탁 위에 놓인 아침식사를 다시 먹었다. 불과 30분이 지났는데 빵은 퍼석하게 말라있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빵을 우유에 적셔 먹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가만히 무릎 위에 앉아 건네주는 빵을 먹기만했다.


이후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거실을 서성였다. 이날 눈물을 터트린 건 산후조리원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과 후회, 자신에 대한 원망과 같은 복잡한 감정이 뒤엉켰을테다. 무엇보다 굳게 닫혀버린 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 좌절했던 것 같다.


고맙게도 그동안 아이가 크게 아픈 적이 없었기에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오만함에 빠져있었다. ‘왜 아이를 높은 이유식 의자에 앉혀놓고 자리를 비울 생각을 했을까’, ‘현관문이 잠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신문이 뭐 그리 중요하기에 창문 하나 열어둘 생각도 못하고 뛰쳐나갔을까’, ‘혹여나 이 일이 아이에게 상처를 남기게 되진 않을까’.


생각의 구렁텅이에 빠져 방황하던 사이 이윽고 가만히 앉아 놀고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놀아달라고 보채지 않고 혼자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 순간 직감했다. 차고문을 발로 부술 때보다 더 강해져야 하는 순간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아이가 없던 시절에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원없이 감상에 빠져들며 원망과 자책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닥치는대로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만나서 힘든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고, 글을 쓰면서 마음을 정리하기도 했다.

이날 나는 향을 피워보기로 했다. 작은 접시에 얼마전 마트에서 사뒀던 향 한 조각을 꽂아 불을 붙였다. 불씨가 사그라들고 연기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거실을 감쌌다. 이어 편안한 나무향이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나는 오늘 십여분이면 재가 돼버릴 향 한 조각에 내 마음을 맡겨보기로 했다.


출장 중인 남편, 멀리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서 살고 있는 가족과 친구, 당장 노트북을 열어 글을 쓰기 어려운 상황. 이럴때 가장 이상적인 것은 단단하게 단련된 스스로에게 의지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단단해지고 싶고, 단단해져야 하지만 아직 단단하지 않은 나는 잠시 향 한 조각에게 기대보기로 한 것이다.


은근히 미신 따위를 즐기는 나는 십여분 동안 향의 연기가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며 오늘 아침의 안좋은 기억을 탈취해주길 빌기도 했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다 타고 남은 재를 서둘러 치웠다. 그리고 오늘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방법을 집주인과 의논했다.


오후는 예상보다 평화롭게 흘러갔다. 무엇보다 예전과 달리 스스로를 진정시킬 방법을 찾고 빠르게 일상을 되찾으려는 내 모습에 은근 놀라워하고 있었다. 뿌듯하고 대견했다. 이번에는 향을 피워봤으니 다음에는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야지. 이렇게 아이와 함께 있을 때 힘든 순간을 견디는 나만의 방법들을 찾아가다보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아주 단단한 사람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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