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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담마 Dec 08. 2019

어마어마한 글을 쓸 뻔했어

건망증과 자료관리


커피를 내리는 중에 근사한 생각이 떠올랐다. '시작'과 '출발'에 관한 두 개의 이미지였다. 두 달 전에  '결심'이란 주제로 글을 끄적거려놓은 게 있다. 방금 떠오른 영감과 그 글을 버무리면  좋을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 커피 여과지 위로 뜨거운 물을 가득 부었다. 거품이 보글보글 생기며 커피 빵이 넘칠 듯 부풀어 올랐다. 도자기 드리퍼 아래로 갈색 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답답하게 지켜보았다.

  

커피잔을 들고 책상으로 돌아오니 쓰다 만 노트가 보였다.

 

'아, 맞다! 꿈 일기를 쓰던 참이었지.'


나는 일기를 쓰다가 커피 물 올려놓은 게 생각나 주방으로 간 거였다. 전기 포트 물은  플라스틱 냄새가 나서 싫었다. 게르마늄 주전자를 사기로 마음먹은 지가 언젠데, 여태 냄비에다 커피 물을 끓이고 있다. 바닥에서 거품이 몇 개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완전히 끓으려면 더 기다려야 했다.


다시 서재방으로 돌아와 글을 쓰다 아참! 하고 정신을 차렸다. 어제 고구마 삶다가 냄비를 태워먹은 기억이 생생했다. 주방으로 달려가 보니 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커피 내리는 일이 귀찮아 아침에 네 잔 정도를 한꺼번에 만들어둔다. 옆에 지키고 서서 드퍼 수면이 낮아질 때마다 물을 보충해주어야 다. 커피잔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을 땐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꿈은 기억이 남아있을 때 얼른 기록해두어야 한다. 꿈 일기를 이어서 쓴다.


J 전화번호를 겨우 찾았다. 종이 귀퉁이에 씌어 있었다. '010'으로 시작되어야 할 번호가 '0D0'으로 적혀있었다. 무시하고 010을 누른다.  거대한 자석 같은 힘이 버튼을 못 누르게 내 손을 저지하는 것 같았다. 그 힘을 거스르며 사력을 다해 숫자를 눌렀다. 마침내 번호를 다 입력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전화기를 귀에 바싹 붙여본다. 아주 작은 소리로 음악이 흐르고 있다.  J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여기까지 쓰고 나서 문득 깨달았다. 이 꿈이 J와 화해하고 싶은 내 소망을 담고 있다는 걸. 노트를 덮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렇구나. 내 마음이 화해를 갈망하고 있었구나. 나는 이대로 괜찮다 생각했는데, 내 안의 착한 여자는 이렇게 지내는 게 괴로운 모양이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다 주위를 돌아본다. 뭘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결심!


노트북을 켜고 브런치에 접속한다. '작가의 서랍'에 보관 중인 글을 열어본다. 두 달 전 책을 쓰겠다고 결심했다. 그때의 다짐을 중구난방으로 기록해 둔 글이었다. 결심과 관련된 아포리즘 두 개, 책을 인용해놓은 글귀들, 내 생각을 몇 단락에 걸쳐 써놓은 게 전부였다.


커피 내리다 여기 버무리면 좋을 글감 두 개를 떠올렸. 그런데 그게 뭐였더라? 맙소사, 어마어마한 아이디어였는데!


책을 쓰기로 결심한 날의 풍경을 빛내 줄 소중한 글감이었다. 숨을 죽이고 머리를 굴려보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현장에 가보면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


주방으로 나와 거실 창을 바라보았다. 커튼 봉에 철사줄로 걸어놓은 수염 틸란드시아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이 식물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미세먼지 식물'이란 키워드로 검색해 겨우 알아냈다. ㅠ)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장소에서 똑같은 자세를 취해보았지만 소득이 없었다. 주옥같은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렸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주방에서 일하다 뭔가를 가지러 베란다로 나갔다. 거기서 다른 일을 하다 또 뭐가 필요해 거실로 갔다. 그곳에서 또 주방으로 가게 되었는데, 건망증의 연쇄반응 끝에 나는 최초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날의 일화가  웃겨 글로 써두었다. 그 글과  이 글을 엮으면 좋을 것 같았다


대학노트를 뒤적였다. 찾을 수 없었다. 파란 노트, 노란 노트 뒤져봐도 나오지 않았다. 나중엔 오기가 생겼다. 30권쯤 되는 노트를 다 훑어보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어젯밤 읽은 <노트의 품격>이란 책에 메모의 귀재들이 등장했다. 두 사람이 눈길을 끌었다.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와 러시아 과학자 류비세프.


엔리코 페르미부터 보자. 저자는 페르미의 천재성을 리처드 파인만과의 일화를 통해 들려준다. 파인만은 말했다. 자신이 만난 물리학자 중 최고의 천재가 페르미라고.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천재 중의 전재가 '최고의 천재'라고 인정한 이는 어떤 사람일까.


파인만은 학술대회에서 페르미를 만났다. 그는 몇 달 동안 끙끙대던 계산 문제를 페르미에게 들려주었다. 페르미는 입을 가리고 잠시 속으로 셈을 해보더니 답을 말해주더라는 믿지 못할 일화.


내가 관심 있게 본 대목은 페르미의  메모법이다. 그는 '연구논문들, 문헌에서 찾은 수치들, 바인더 노트에 명확하게 계산하여 쓴 자신의 육필 논문 원고들을' 모아 두고 있었다. 여기에 번호를 매겨 상호 참조하도록 만들어두었다. 그는 색인 노트를 들고 다녔다. 어떤 주제에 대한 자료가 필요하면 색인 노트를 보고 곧장 기록물을 찾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해놓은 거였다.


류비세프는 이보다 더한 메모광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의 사후 서가에서 발견된 서류 뭉치는 실로 기괴했습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던 거예요. 모든 서류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었고, 그에 따라 책의 형태로 묶여 있었는데, 그 분량이 수백 권을 웃돌았습니다.

 

류비세프는 철저한 시간 관리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 어떤 일에 시간을 얼마 할애했는지 일기에 꼼꼼히 기록해두었다. 1964년 4월 8일의 일기를 보자.


곤충 분류학 나방을 감정했음, 완료 2시간 20분

나방에 대한 첫 보고서를 씀 1시간 5분(1.0)

보충 업무 다비도프와 블리야헤르에게편지를 씀(6페이지): 3시간 20분(0.5)

길의 왕복 0.5

휴식 면도, <울리야노프스크 프라우다> 15분, <소식보> 10분, <문학신문> 20분, 알렉세이 톨스토이 <흡혈귀>66쪽:1시간 30분, 림스키코르사코프 작곡 <짜르의 정부>를 방송으로 들음

기본 업무 총계 6시간 45분


시간 관리에 관한 이 사람의 일화를 전에도 여러 책에서 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뭘 이렇게까지 하며 사나?' 하고 의아했었다. 이젠 생각을 달리할 때다.


건망증 자체는 나로선 어찌 할 수 없다. 메모하러 가는 사이에 잊어버리는 걸 어찌하겠는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기록할 것. 그러나 써놓는다고 끝이 아니다. 쌓인 자료를 다루지 못하면 시간 낭비다. 내 노트를 체계적으로 관리했다면, '건망증'이란 키워드로 단박에 필요한 글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메모광들이 자료를 관리하는 법을 알고 싶다. 메모 기술을 다룬 책들과 자료 관리에 도움이 될 책들을 찾아 읽어야겠다. 더 이상 머리를 나무라지 말고, 더 이상 손발 고생시키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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