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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테비 Mar 29. 2024

노트 커버

�️ 스틸 라이프(靜物畵) 004. 노트 커버 (maily.so) 답장


코너스툴님께 받은 노트 커버 편지에 대한 짧은 답장입니다. 편지는 유로 서비스기 때문에 전문을 인용할 수 없는 점 이해 바랍니다.


그의 편지 마지막 문장은

"안녕, 테비 님에게도 비밀 노트가 있으신가요?"였다.


그는 노트 커버를 구입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자연스럽게 노트 자체 이야기로 흘러갔다.

내 답장의 시작은 '비밀 노트'에 대한 생각에서부터다.



한 주 잘 보내셨나요, 코너스툴님

저는 비밀이라는 단어에 비밀은 이미 흐릿해졌을 거라는 일종의 불신 내지는 불안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밀 노트(다이어리)를 만들지 않아요. 비밀이야, 하며 말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달까요. 내가 쓴 글을 미래의 내가 읽는 기분이 과거의 내 비밀을 들춰보는 기분이 들거든요. 누군가의 비밀을 엿보는 희열보다 비밀을 들킨 놀란 자아의 형체가 더 커지기 때문에 들킨 감정에 부끄러움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저는 스케줄러나 일기를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SNS에 쓰는 글은 누가 보아도 개의치 않을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종이와 SNS가 무슨 차이인지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고 내 행동이 모순으로 보이겠지만, 인터넷의 글과 종이의 글은 무형과 유형 같은 덩어리기 때문에 저에겐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케줄러에 빈칸을 채워야 하는 의무감이 저를 더욱 조여 오는 기분이라던지 비어있는 칸을 보면서 나의 게으름을 탓하는 기분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도 크기 때문에 물성으로 남는 다이어리(일기)를 못 쓰는 탓도 있습니다.


노트 커버라고 하니 몇 개의 물건이 생각납니다. 매우 비싸게 주고 산 가죽 다이어리? 스케줄러 커버가 있어요. 다이어리를 쓰지 않지만 한 때 책 기록을 남기려고 샀었죠. 몇 년 쓰다가 책으로 다이어리를 꽉 채울 수 없음을 알기에 여백의 종이에게 미안해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가죽커버는 고이 책장에서 잠이 들어있죠. 종이로 감싼 커버가 놓인 케이스도 있어서 처음과 거의 같은 모습으로요. 핫핑크 색에 타공이 20개입니다. 유명한 플래너 다이어리가 6공 7공에 비하면 매우 많은 타공입니다. 이 제품은 개인이 만든 플래너가 유명해지면서 가죽커버까지 팔기에 저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잠깐 다이어리 커버에 관심이 생겨 20공 커버를 검색하기도 하고 가죽제품 만들기까지 관심이 가 여러 작가나 공방을 팔로우하기도 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마 가죽공방에서 커버나 카드지갑을 만든다면 재생가죽이나 종이 질감 가죽을 사용해 보고 싶습니다.

2015년도 - 독서모임 사람들과 모임 중인지 책 읽기인지 알 수 없으나
세미나 듣기 전 - 그림으로 남겨볼까 해서 찍어둔 사진

그다음 떠오르는 건 지금 제가 왼쪽으로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보이는 무선 노트입니다. 작은 정사각형 다이어리 크기 노트인데, 전 직장을 처음 들어갈 때 야심 차게 샀어요. 회의나 세미나들을 때 쓰려고요. 고무줄로 노트를 고정시킬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미 이것도 7년 정도 세월이 지나서 헐렁해졌답니다. 그런데 아직도 덜 채워서 버리질 못해요. 가름끈도 있는 야무진 노트예요. 표지가 예뻐서 샀는데, 이 표지는 여전히 예쁩니다. 예쁜 표지에 하나만 산 게 갑자기 아쉬워지네요. 표지도 가죽처럼 단단한 재질이거든요. 무선이라서 낙서로 채워졌지만요. 회의를 하든, 세미나를 듣든 낙서는 빠질 수 없네요. 어떤 낙서를 주로 하시나요? 저는 가장 만만한 게 꽃 그림입니다. 어렸을 때 가장 처음 그렸던 꽃 그림 같은 매우 단순하고 수준 낮은. 그 이상 어떤 낙서도 어떤 그림도 안 떠오릅니다. 그럴 땐 낙서에도 창의가 필요하구나 싶죠. 남들은 낙서하면서 온갖 그림을 그리던데 말이에요. 그거 외에 이름 쓰거나, 갑자기 쓰고 싶은 몇 문장 정도를 끄적거리곤 합니다. 이 노트는 아직도 열 장 이상이 남아서 올해 안에 다 쓸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새 학기가 되거나 새 학년이 되었을 때, 몇 장 쓰고 남은 공책을 도저히 버리지 못해 쓴 부분만 찢어서 버리고 이어 쓴 그때 습관이 남았나 봅니다.


이런 말 적으니 우리 집 청소년이 자기 책상 정리 좀 해달라고 한 말이 생각나네요. 너무 쌓여있어서 지도 치울 엄두가 안 나나 봅니다. 오늘은 청소년 녀석의 노트를 보는 날이겠네요.


그럼 또 한 주 잘 보내세요^^


2024. 03. 27. 수

안녕, 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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