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가 한 단에 750원

2022년에 꺼내 먹는 2021년의 글 <읽는 먹방>

by 덩이

냉장실에 대파 흰 부분 서너 뿌리 다듬어 놓은 것도 있고 냉동실에는 송송 썰어놓은 대파 한 봉지가 있지만 750원은 못 참겠다. 겨울에 한 때 삼천 원이 훌쩍 넘게 비쌌던 기억을 떠올리며 매끈하고 하얗고 초록의 색깔로 나를 부르는 대파를 한 단 집어 든다. 세일하는 물건이라도 싱싱하고 끝에 누렇게 된 부분도 없다. 파뿌리가 아주 약간 시들었지만 파뿌리만 잘라내 물에 씻어서 담가 두면 금세 싱싱하고 통통한 본모습을 되찾는다. 두 단을 사고 싶지만 과유불급이랬지 한단이면 됐다.

파뿌리로 국물 내는 것을 배운 뒤로는 절대 파뿌리를 버리지 않는다. 파뿌리 사이에 왠지 덜 씻긴 흙가루가 있을 것만 같았고 음식에서 흙이 씹힐 것만 같은 찝찝함이 있었는데 국물 맛을 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 뿌리의 감칠맛은 상상을 초월한다. 파뿌리도 싹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말려 냉동실에 얼린다. 고기든 해물이든 육수를 내는데 파뿌리가 들어가면 달큰하면서 시원하면서 개운한 향기가 난다. 그 국물로 만드는 요리에는 좀 더 자신감이 생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파를 한 단 사면 한 뿌리만 쏙 뽑아 꺼내 썰어서 음식에 넣고 남은 건 비닐에 둘둘 말아 냉장고에 아무렇게나 넣어 두었다. 다듬지 않은 나머지 대파는 봉지 그대로 서늘한 곳에 두어도 며칠만 있으면 끝부터 누렇게 마르고 시들해지다가 나중엔 바싹 말라버렸다. 야심차게 다듬었다 해도 비닐에 넣어 냉장고에 보관한 대파는 오래 보관하지 못하고 어느 순간 문드러지고 썩어버린다. 한 단을 야무지게 다 먹지 못하고 그렇게 버리는 게 반이었다. 그때는 대파 한 단 다듬기가 왜 그렇게 귀찮았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시간을 들여 다듬는다. 국물용으로 쓸 흰 부분 절반 정도는 긴 플라스틱 통에 들어갈 만한 길이로 잘라 세워서 담아 보관하고 나머지 부분은 송송송 썰어 지퍼팩에 담아 냉동실에 쟁여둔다. 음식을 만들 때마다 파를 썰 일이 없어서 참 간편하다. 대파를 썰면 매운 눈물이 나지만 그 참에 눈물을 흘리며 탁해진 안구와 마음을 정화한다. 대파 한 단을 다 정리하고 썰어 놓고 나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일상을 살면서 나의 손길이 닿아야 하는 많은 일들이 있다. 그중 유독하기 싫고 힘들고 귀찮은 일들이 있다. 특히 집안일이 그렇다.

식물을 돌보는 일, 이불과 베갯잇을 정기적으로 빠는 일, 걸레로 바닥을 닦는 일, 흰 양말의 찌든 때 애벌빨래하는 일, 다 된 빨래를 널거나 개는 일.

희한하게도 지금은 예전처럼 그렇게 지치고 힘들고 미루고 싶고 귀찮은 일이 아닌 쪽으로 가고 있다.

그냥 하다 보면 결국 다 하게 되어있다. 내 생각이 바뀐 건지 내 몸이 익숙해진 건지는 모르겠다.

물론 아직도 나의 일상은 귀찮고 하기 싫고 바쁘고 늦고 재촉하고 늘어지는 일들이 허다하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적어도 대파 다듬어 정리하는 것쯤은 참 잘하고 살고 있다.

부드럽게 넘어간다

2022년 8월 27일 현재

우리 동네 마트 기준 대파 가격이 1850원

어제 대형 마트에서는 2천 원이 넘은 걸 본 것 같다.

가끔 대파 다듬기가 귀찮아지려고 할 때 내가 쓴 글을 떠올린다. 내 글에 책임지려고 몸을 일으킨다. 이것이 나의 글쓰기의 순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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