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살던 양옥집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양옥집 계단은 높낮이가 달랐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어른들과 달리 넘어지지 않기 위해 한 발자국 올라 제자리걸음 하는 식으로 계단을 올랐다. 외할머니 댁은 산동네 꼭대기였다. 명절 때마다 가족들은 덜컹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랐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도 또 한참 걸었다. 땀 흘리며 걷다 보면 언덕 위에 빨간 집, 벽돌로 지은 2층 양옥집이 보였다.
“계단이 너무 높아 힘들어.” 계단 때문에 불평할 때면 엄마는 항상 같은 말을 했다. “외할아버지가 시멘트 발라 직접 만든 거라 그래. 조금 불편해도 엄마는 할아버지가 손수 지은 이 계단이 좋은 걸.”
계단 말고도 외할머니 댁에 가면 불편한 것이 참 많았다. 사촌동생들 손을 잡고 군것질거리를 사러 갈 때면 꼭 현금을 가져가야 했다. 미소(?) 슈퍼 할머니는 먼지 쌓인 바나나킥을 팔면서도 카드는 받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미소 슈퍼가 좋았다. 1년에 두 번, 설에 한 번 추석에 한 번 약수동에 갈 뿐인데도 미소 슈퍼 할머니는 “네가 영이 딸이니?”하며 천하장사 소시지 두어 개 더 쥐어주곤 했다. 소시지 두 개와 함께 찾아오는 건 그저 ‘공짜 과자’가 생겼다는 희열뿐 아니라 엄마의 유년을 기억하는 누군가에게서 전해오는 오래된 시간의 따뜻함이었다.
“할머니 이사 가신대.” 동네가 재개발지역으로 선정됐다. 외할아버지의 무릎도 많이 안 좋아지셨던 때라 할머니는 산동네 꼭대기에서 지하철역이 가까운 평지로 이사하기로 했다. 지하철역 3분 거리 초역세권. 깔끔한 신축빌라가 모여 있는 깨끗한 동네로 할머니는 이사했다.
모든 게 편리했다. 높낮이 다른 계단 대신 신축빌라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걸음이 불편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안성맞춤이었다. 신축빌라 1층에는 편의점도 있었다. 편의점은 동네 구멍가게 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과자들이 넘쳤다. 오백 원 하는 젤리도 카드로 결제해줬다.
몸은 분명 편리해졌는데 무엇인가 빠진 듯했다. 더 빨라지고 더 깔끔해진 새로운 동네에는 익숙하지만 낯선 새 것들의 냄새가 가득했다. 산동네 언덕 하나 내려왔을 뿐인데 구불거리는 산길에서 노란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 심부름하던 어린 엄마와, 그때의 엄마를 기억하는 슈퍼 할머니와, 다섯 남매와 함께 살 생각으로 서투르지만 사랑을 담아 시멘트를 바르던 할아버지까지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허물어졌을 산동네 2층 양옥집에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두고 온 것 같았다.
편리함의 비용으로 추억을 지불해버린 걸까. 더 편리하게, 더 빠르게 변하는 것들을 지켜보면서 나 혼자 느린 시간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조급해진다. 조금 느리게 바뀌면 안 되는 걸까. 나도 모르는 사이 시간여행을 하게 만들었던 소중한 그 무엇들이 이사한 새 집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명절 때마다 펼쳐보며 온 가족을 깔깔거리게 만든 엄마와 삼촌의 졸업앨범이 새로 산 에어컨 위에서 혼자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