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꿈을 향한 아이

by 연두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한다. 현서를 깨우고 내가 먼저 샤워를 하고 나와 옷을 갈아입고, 남편과 큰아이를 위한 아침을 준비한다. 햄을 썰어 노릇노릇하게 계란을 풀어서 모양을 잡아 놓고 양상추를 씻어 물을 빼놓는다. 식빵 한쪽에 머스터드소스를 바르고 다른 한쪽에는 크림치즈를 바르고 중간에 케첩을 뿌려가며 준비된 재료를 차곡차곡 쌓는다. 식탁 위에 얌전하고 올려놓고 작은놈을 채근하여 김포공항으로 출발. 5시 30분에 집을 나선다. 서둘러 준비를 했건만 제주도는 나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 짙은 해무로 인해 비행기의 이착륙이 금지된 상태. 최악의 경우는 캔슬..... 한 시간을 기다려 수속이 재개되고 7시 20분부터 탑승이 시작되어 7시 50분 출발. 오랜만의 비행에 마음이 설렌다. 제주공항에서 500번 시내버스를 타면 우리 목적지인 제주대학을 간다고 한다. 멀미가 날 즈음,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코끝에 진하게 와닿는 밤꽃향기에 속이 울렁거린다. 같은 꽃인데 밤꽃 향은 어찌 그리 속을 뒤집어 놓는지....


작은 아이와 학교도 둘러볼 겸 교내순환버스를 포기하고 걸어서 의과대학 건물을 찾아가는 길이 멀고도 덥다. 간신히 찾아 올라선 강@@법의학 교수님 실이 있다. 학교 맨 끄트머리에..... 의과대 건물 맨 꼭대기에 교수님 방이 있었다. 기다리셨다는 듯, 반갑게 반겨주시는 강교수님의 미소에 피로가 풀리는 것 같다. 교수님은 점심도 같이 먹고 준비해 둔 자료도 같이 들여 보자고 하신다. 현서가 당돌하게 연락해서 찾아온 걸 오히려 기특하게 생각해 주시니 학부모인 나로서는 무척 고마울 따름이다.


작은놈이 교수님에게 질문할 질문지를 드리고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가려 할 때 교수님에게 양해를 구했다. 학교에 휴게실이 있다면 그곳에서 대기하겠다고, 현서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자리를 피해 드리겠다고 했다. 강 교수님이 안내한 곳은 교수휴게실이었다. 컴퓨터를 사용해도 되고 원두커피를 내려 마셔도 된다고 하신다. 난 갖고 내려간 책이 있어서, 책을 보면서 쉬겠다고 했다. 그분의 마음 써주심이 고맙다. '무소유'를 가방에 넣어 갖고 갔는데 교수휴게실에 수필 한 권이 눈에 띈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의사 수필가 협회에서 출판된 에세이집인 것 같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그들의 고뇌와 상처가 그대로 노출된 맑은 글. 그들도 같은 심성을 가진 인간이지 싶다.


아이가 내려올 것을 기다리며 놀멍놀멍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생각보다 편안한 이곳이 졸음이 오게 만들었다. 12시가 다 되어 내려온 아이와 교수님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함께 가려던 식당이 오늘 휴일이라고... 미안해하신다. 점심을 먹고 다시 찾아오면 현서에게 파일을 보여줄 것이라 학교 내 순환 버스를 타고 다녀올 것을 권하신다.


현서와 점심을 먹기 위해 나선 길. 길 끝에 '나비'라는 파스타집이 있다. 제주도에서의 파스타라..... 내심 기대를 하고 먹었지만 생각보다 별로이다. 파스타는 맛이 없었고 다른 메뉴인 치킨 롤은 먹을 만했지만 끼니를 때우기에는 양에 차지 않는다. 덕분에 현서와 나는 편의점에서 우유와 간식을 다시 사서 나누어 먹는 번거로움을 치른다.


점심 후에 현서는 교수님과 나머지 일정을 소화한다. 강 교수님은 부검이 있어 옷을 초록의 수술복을 갈아입고 계신다. 처음엔 현서를 함께 부검에 참여하도록 해 볼까 고려하셨지만 난 고맙지만 아이를 위해서 그다지 반갑지 않은 제안이라고 거절했다. 아이가 아직은 어리다. 호기심으로 함께 들여다보기엔 너무 버겁다. 교수님도 내 의중을 헤아리고 현서를 다독인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라고 그동안 열심히 공부를 하고 준비를 하라고 덕담을 해 주신다.


현서는 강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린다. 꿈을 갖고 매진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난 내 젊음을 되돌아본다. 이번 주는 한가람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의 직업 체험 기간이다. 일주일 동안 자신이 원하는 직업군을 선택해 직접적인 체험을 해 보는 기간이다. 리포트도 작성해야 하고 사진도 찍어야 한다. 거친 현무암, 제주 용암의 덩어리들이 파도에 쓸리고 닦여 부드러운 둥근돌이 되었다. 얼마의 시간을 치러 냈을까? 겉보기엔 부드러운 물이 단단한 바위를 어루만져 부드러운 곡선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황혼 녘에 섰고, 내 아이는 여명에 섰다. 나는 그믐달이고, 내 아이는 초승달이다. 내 아이가 설 세상이 내가 그러했듯 아이에게도 녹록지 않는 곳이긴 하겠지....


아이는 의지할 사람을 찾아야 할 터.... 좋은 부메랑을 갖는 건 내 아이의 몫이다. 저녁나절이 다 되어 작은 아이와 서귀포를 들어섰다. 코끝에 숨이 차도록 들어오는 감꽃의 향. 재스민향 같기도 하고 아카시향 같기도 한 묘한 향기. 어스름한 낙조 끝에 진동하는 꽃의 향기. 짙은 여운을 만들어준다.


옆에 선 사람이 연인이었다면 아마도 둘은 매직에 걸렸으리라. 울긋불긋 꽃 대궐 속 마술에 걸린 연인. 세상 끝이다 싶은 시간도 있겠지? 어찌 승승장구만 있을까? 파도가 치듯 너울이 일듯, 아이의 삶도 매일 행복하진 않겠지. 스티븐 호킹 박사가 얘기했단다. '고통스러울 때 발밑을 보지 말고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라고 했단다' 험난한 폭풍 속에서 등대를 만나 빛을 의지해 찾아가듯 삶의 긴 항해 속에서 멘토를 만날 수 있음 또한 행운이다. 우리 아인 그 멘토를 찾아 나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누가 될지,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찾아 나서는 작업을 하는 그 순간마저 아이에게 약이 되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내 황혼의 모습이 아이에게 어떤 거울이 될지 부끄럽지는 않을지 저어하게 된다. 꿈을 향해 비행을 시작하는 아이. 내 곁을 떠나 다시 돌아올 그때까지 아이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를 늘 해주고 싶었다. 혹여, 네가 사람들의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었을 때, 상처투성이가 되어 손을 내밀었을 때 네 손을 잡아 어루만져 주며 걱정하지 말라고.... 네 편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살아감에 힘이 되어주는 분들. 네 가까이 있는 사람이 엄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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