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정해놓은 목적지도 없이 길을 나섰지만 남편은 내게 그냥 길 닿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뜻해서 잠시 졸았다. 천안휴게소.
“자기야, 커피 한잔하고 갈래?”
남편과 11월에 만났었다. 1993년 11월에 첫 만남. 대학친구인 지영이 소개로 만났는데, 지영이와 남편이 회사 동료 사이였다. 처음에 지영이는 남편과 또 다른 대학친구인 수연이를 소개해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약속 당일 수연이와 남편과의 시간이 서로 맞지 않아 대타로 나선 내가 남편과의 이십 년째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가끔 수연이와 만나 그날을 이야기하며 엇갈린 운명을 떠들곤 한다.
(올드 저머니)라는 신촌에 있는 맥주 집에서 처음 만났다. 초면이었지만 우리는 가볍게 맥주 한잔 하며 이야기하고, 술김에 노래방에서 즐겁게 놀고 난 뒤 약속도 없이 헤어지려 했다. 그런 내게 그는 애프터 신청을 위해 전화번호를 물어보는데 농담조로 재주껏 알아보라고 했더니 이 남자 지영이에게 너무 쉽게 얻어 냈나 보다. 두 번째 만남은 커피숍. 무슨 이야기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둘이 앉아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남자. 일단은 서로 소통이 잘 되어야 살면서 답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상식도 풍부하고 인상도 좋고 미소가 예쁜 남자였다. 나머지 조건은 그저 그러함.
그냥 그저 그랬던 남자가 남편이 되고 보니 어려운 점이 많았다. 성격이 일단 나와는 많이 다른 것이다. 무척 활발한 내 성격과는 정 반대로 남편은 내성적이고 섬세하다. 물론 사람마다 양면성이 있기는 하다. 내 성격도 활발한 반면 소심한 부분도 있고 의외로 낯가림도 하고.... 그런데 남편은 사람들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늘 사람에 둘러싸인 나와는 많이 다른 사람이다. 그렇다고 타인에게 배타적인 건 아닌데 그냥 조용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함께 살며 어느 정도 중화가 되었지만, 결혼 초기엔 성격차이로 힘이 들어 고민도 많았었다. 서로 다른 집안에서 성장해 한 가정을 꾸리며 산다는 건 오랜 참을성과 신뢰가 필요한 부분이다. 먹거리도 다르고 가족 문화도 다르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육아방식도 서로의 방법이 있어, 일일이 조율을 해야 하는 부분들이 쉽지 않아 눈물도 많이 흘렸었다. 그래도 결혼 초부터 초지일관, 바뀌지 않는 우리 부부만의 규율은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잠자리는 한 곳에서 하는 것이다. 별것 아닌 약속이라 할 수 있겠지만, 서로에게 화가 나고 실망한 상태에서 한 이불을 덮고 눕는다는 건 어찌 보면 또 다른 싸움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함께 한 이불속 한밤을 지나고 나면 어지간한 싸움은 싱겁게 끝이 난다.
그렇게 보내온 지난 이십여 년의 결혼생활. 지금은, 그냥 좋다. 익숙하고... 서로에게 길들여진 시간만큼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되어주고 있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이 오늘처럼 함께 달리는 쭉 뻗은 고속도로는 아니었지만, 크게 굴곡지지는 않아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남편이라고 이렇게 어수선한 아내와 함께 맞춰온 시간이 역시 쉬웠겠는가? 조금 부족한 부분을 서로 채워주고 멀리 바라보며 발맞추어 온 시간, 지금처럼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앞으로도 갈 테지?
남해로 가는 길, 오늘 하늘은 유난히 파란 것 같고 공기도 맑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