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눈물이 없는, 가장 눈물이 많은

<같은 바다, 부레 없는 우리-제3부 가족>

by 쌍둥이 아빠

가장 눈물이 없는, 가장 눈물이 많은


어린 시절엔 정말 엄청나게 많이 싸웠다. 청소년 시절에는, 비비화며, 헤어스프레이며, 디스코 청바지 같은 유행을 따르기도 했던. 큰누나가 집을 떠난 후로, 둘이 먹는 저녁을 깔깔거리는 웃음과 변화무쌍한 성질로 꽉 채워주던, 리모컨을 뺏고 빼앗기던, 작은누나.


연년생 작은누나는 내게 제일 만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예나 지금이나 눈만 한번 흘깃해도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게 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작은누나는 늘 사리에 밝았고, 아무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억울하거나 무엇에 져서 우는 걸 본 적도 없다.


작은누나도 공부를 썩 잘했다. 작은누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지역 제일의 인문계 여고를 가는 대신,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등교를 앞둔 아침. 앞머리를 둥글고 높게 말아 올리며 헤어스프레이를 뿌리던 누나.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감았던. 온 시내 학교들이 함께 소풍을 가는 날이면, 무리지은 여고생들 제일 앞에 작은누나가 있었다. 나는 좀 우습기도 하고, 아는 척해야 하나 고민도 돼서 멀리 돌아가기도 했다. 어쩌다 마주치는 일이 있으면, 작은누나는 피식 웃거나 뭔가 지적하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누나는 내가 무슨 실수를 하는 순간이면, 앞뒤 아무런 설명 없이 딱 한마디를 하곤 했다. 야!


나는, 얼른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살피고, 이것저것 수선을 떨다 보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작은 누나가 흘긴 눈을 거두곤 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작은누나는 일 년에 몇 차례 정도는 무섭게 공부했다. 인문계 고등학교 다니던 나보다 짧지만, 더 무시무시하게 공부했다. 늘 성적표는 1등이었다. 그리곤 대수롭지 않게 또 놀았다.


카리스마 넘치던 여고생 시절이 마무리되어 갈 무렵. 작은누나는 갑자기 대학 진학을 선언했다. 주판과 타자기를 방구석에 밀어 넣고 국·영·수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수능이 채 몇 개월 남지 않은 시기였다.


수능을 본 날 저녁. 작은누나는 방문을 걸고 울었다. 나는 작은누나의 울음 소리를 문밖에서 들으며, 앞머리를 세우던 누나와, 여고생 무리 제일 앞에 선 누나를 떠올렸다. 나는, 누나가 다른 꿈을 꾸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솟구치는 열망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일 년에 몇 차례 그 짧고 무시무시한 공부를 하게 한 것도 알지 못했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누나는 어울리지 않는 화장과 어울리지 않는 블라우스를 입고 두어 번 어딘가 면접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작은누나는 집에 없었다. 나만 남겨두고 작은누나도 집을 떠났다.

가출한 작은누나는 서울 큰누나의 자취방으로 갔다. 다행이었다. 1년 후 수능 날 저녁 작은누나는 울지 않았다. 작은누나는 대학에 합격했다. 뭘 어떻게 한 건지. 나는 좀 신기하기도 했다.


작은누나는 대학 생활을 당차게 잘 해냈다. 나와 달리 사투리도 쓰지 않았다. 학교 방송국 활동을 하며 작은 매형을 만났다. 작은누나에겐 1년 선배의 동갑이었는데, 누나는 가끔 오빠라고 불렀다.


이후 작은누나는 가장 평범한 나이에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아갔다. 스물여덟에 결혼해서 바로 첫아이를 낳았고, 또 이년 후에는 둘째를 낳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직장생활과 육아휴직을 반복하며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우리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었다. 그때 큰누나는 일만 하는 노처녀였고, 나는 여전히 방황하는 청춘이었다.


작고 소중한 조카들. 화목한 가정.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우는 법도 작은누나에게 보고 배웠다.


같은 학번, 같은 젊음을 보냈지만. 늘 제일 먼저 일상의 바다를 헤엄쳐간. 겨우 한 살 위면서 가끔 용돈을 보내 나를 지배한 작은누나. 큰누나와 나에게‘이것 봐 살 수 있잖아!’라고 증명한 작은누나.


큰누나와 나는 덕분에 일상을 견딜 용기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가끔 내가 전화하면. 왜! 뭔 일 있어? 뭐든 명쾌히 해결해 줄 듯한 목소리가 옛날처럼 앞장을 선다.


요즘 다리를 다쳤는데 잘 낫지 않는 작은누나. 사랑하는 나의 친구. 우리들의 눈물 많은 대장. 언제나, 언제나, 건강하고 어여쁘시길!!


그리고, 누나를 여자 친구로, 아내로, 엄마로, 한 인간으로, 무한히 아끼고 안아주신. 내겐 종교 같은 사람. 작은 매형에게도 충성의 마음을 전한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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