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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May 01. 2022

9일 차

2022. 05. 01

Q. 어릴 때 당신이 부모님에게 강요받았던 가치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큰 게 하나 왔습니다. 나는 이미 그게 곧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마치 몰랐던 사람처럼 엉엉 울어봅니다. 그것과 관련된 가치가 있습니다.

엄마는 제 인생 하나 살아내기가 많이 버거웠습니다. 하지만 엄마에겐 제 인생에 덕지덕지 붙은 것들이 너무 많았죠. 잃어버린 다른 인생의 흔적들과 아직 인생이란 걸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인생까지 말예요. 엄마는 많은 시간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때마다 내가 언젠가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를 나의 인생이 그녀를 살게도 죽게도 못하게 만들었겠죠. 그녀의 모든 의지가 좌절당하는 경험이었을 겁니다.

그 좌절감은 엄마를 넘쳐흘렀고 뜨겁고 날카롭게, 아프게. 늘 나와 술래잡기를 하였죠. 책임이 뭔지도 모르는 나는, 무책임하다는 말을 '아빠처럼'이라는 단어로 배웠습니다. 내가 나의 삶에서 배운 무책임이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줘놓고 책임지지 않는 것, 피해를 주지 않을 노력도 하지 않은 것 등입니다. 그래요. 나는 언젠가 이런 비슷한 말들을 다른 질문의 답으로 썼었죠. 

내가 무언가를 잘하지 않으면 나는 잘못을 한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잘하지도 못할 거면서 무언가를 시작하면 나는 잘못을 한 것입니다. 나는 잘해 보이는 게 많은 아이였습니다. 엄마는 나에게 아낌없는 투자를 빚을 내어야만 할 수 있었죠. 내가 뭘 잘하지 않았더라도 엄마는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에 깔려 발버둥 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큰 맘을 먹고 빚을 내어 가르쳤는데, 금세 그만두거나 열심히 하지 않거나 처음만큼 잘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면 엄마는 화를 냈습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엄마가 나와 함께 하는 동안에 기분이 나쁘면 나는 잘못을 한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기분이라는 것은 나와 상대방이 힘을 합쳐 망쳐야만 망가지는 것인데, 아마도 엄마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나는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합니다. 어떨 땐 알고 말을 하고, 어떨 땐 모르지만 말을 합니다. 모르지만 하는 말은 더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엄마만을 위한 애씀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로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한다고 합니다. 나는 무엇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지는 하나도 모르겠지만, 내가 엄마가 받은 '피해'와 관련하여 어떤 말을 건넬 때면 나는 "아빠같다"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때 나는 버려지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나라도 엄마 편을 들며 나를 미워하고 나에게 폭력을 가하면 내가 버려지지 않을 줄 알았나 봐요. 나는 엄마가 나로 인해 피해를 받을 때마다 내게 죽으라고 했습니다. 


Q. 그 강요받은 것이 당신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세요?

그럼요. 하지만 언젠가는 더 이상 행사할 수 없는 영향이 될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다시 이 기억이 찾아온 것은, 지금 나에게 다시 이 기억과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때의 아픔이 제발 나 좀 놓아달라고. 우리 이제 그만하자고. 내 안에 꽁꽁 가둬두는 것이 아닌 잘 이별하기 위함인 것을 압니다. 

나는 무책임하지 않으려고 너무 많은 애를 써왔습니다. 잘하지 못할 것은 시작하지 않으려고, 시작한 일은 잘해야만 했죠. 동시에 천부적인 재능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일은 점점 더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 재능으로 무언가를 잘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을 때면 나는 그것을 책임질 도리가 없었거든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항상 애를 써왔습니다. 나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그것만큼은 정말 내가 어떻게 보상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으니.. 나는 내가 책임질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그것들과 이별을 선택했습니다. 상대가 책임질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도 마찬가지였죠.

나는 이제 그 모든 죄로 십자가에 못 박아둔 나를 해방시켜줄 생각입니다. 나는 사실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나의 애씀들에는 무엇을 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참 고생이 많았습니다.


Q. 온 가족이 다 같이 생활했나요?
Q. 아니라면 그 이유는요? 언제 다시 같이 생활했나요?

내가 어릴 적 나는 종종 외할머니 손에 맡겨졌습니다. 엄마는 늘 돈을 벌었고, 그중 몇 년은 아빠의 공부를 도왔다고 들었습니다. 아빠는 평일에는 기숙사에서 공부를 하고 주말마다 돌아왔었었나요?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아빠가 집을 나간 것은 내가 중학교 입학하기 이틀 전, 그리고 다음날 엄마와 나는 원룸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죠. 나는 어떻게든 엄마와 살지 않을 방법을 꾀했습니다. 그렇게 아빠가 떠나고 내 방도 없는 채 엄마와 함께 산 것이 4년 정도?

아빠와 연락이 끊긴 것은 아빠가 집을 나가고부터 2년쯤 후였고, 그 후로 처음 소식이 전해져 온 것은 몇 년 전이었습니다. 한 번은 생활비를 지원해달라는 정부를 통한 요청이었고, 한 번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죠.

내가 온 가족과 다 같이 생활하게 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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