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치기

하루살이

by 그믐

며칠간 누적된 피로는 발끝에서부터 녹아들어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마치 독한 술에 잠긴듯 헤어나올줄을 모른다.

한 해가 한 주로 줄여진 이 시점에서 어찌 그 피곤함을 심장 한가득 채워 잠을 청하겠는가.

한 해를 산 것인지, 몇 달을 산것인지, 아님 며칠, 몇 시간만으로 일년을 정의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혹은 몇년이 열두달에 억지로 구겨져 들어간 것 같은 기분 역시. 어떻게 감당해야할지 모르겠다.

언제나 그렇듯 나의 새해는 시작 며칠 전 다이어리 뒷켠에 끄적끄적 적어놓은 한페이지의 단어들과 함께 시작된다.

그러나 한살한살 나이가 먹어가고, 책임져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24시간이 보통 사람이 하루에 해야하는 것들을 모두 하기에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라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페이지의 존재 자체도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간다.

영국에 와서부터는 그런 페이지를 적는 일을 일년에 두번 하는 것 같다. 한해가 끝나기 전과, 새 학년이 시작하기 전.

목표를 적고, 계획을 적고, 꿈과 갖고싶은 것들 그리고 변하기로 다짐한 것들을 적는다.

선천적인 게으름이 꾸물꾸물 비집고 나와 나를 잠식해버릴 틈도 없이 지나갔던 한해의 끝에서, 내가 그 페이지의 존재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이 초래한 엄청난 결과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그렇다 나는 현실을 사는 사람이다.

어느순간부터 계획은 계획대로, 목표는 목표대로, 꿈은 꿈대로 따로따로 논다.

그것을 뒷바침해줄 수 있는 현실이라는 것은 나에게 없었다.

몰랐던 사실이나, 미처 보지못했던 것들을 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의 꿈과 목표는 흔들렸으며, 그때의 현실은 나의 총체적인 선택을 바꾸어 놓았고, 나는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책임져야할지에 대한 계획이나 마음가짐도 없이 현실에 충실하였다.

그때의 그 현실은 나를 지금까지 살게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나를 외면해버리고, 나는 그 선택을 책임지며 살아간다. 나는 그것에 대하여 즐겁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선택을 즐거이 했던것은 그때의 나였고, 지금의 나라면 그때의 그 선택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나는 그저 그때 일어날거라 믿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감당'해 나가고 있는 것이 최선이고 또 전부였다.

그러하여 나는 여전히 나의 목표나 꿈을 찾고 있으며, 그것을 모르겠기에 방황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나였다.

내가 과거, 어느 순간의 현실에서 선택한 것이 미래에 대한 계획인지는 모르겠다.

어떠한 것들은 수개월을 거쳐 결정을 내리게도 하지만, 어떠한 것들은 나의 상황에 의하여 저질러 지기도 했다.

지금이라는 순간의 현실을 살고 있는 나는, 끊임없이 지금의 내가 내려야할 결정과 과거의 내가 저질러놓은 선택에 책임을 지면서 살아간다.

무슨 일을 계획하는 일은 마치 내가 값비싼 명품가방을 산다거나 말도 안되는 곳을 여행하게 될거라는 꿈인지, 계획인지도 모르겠는 일들을 적어 놓을 때처럼, 그 어떤 일이든 나는 그저 계획할뿐 실현되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관념 하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내가 다이어리 뒷 켠, '꿈'이라는 란에 적어놓은 것들은 언제나 그렇듯 꿈처럼 증발해버렸고,

월별달력 한 켠에 파랗거나 빨갛게 적어놓은 것들은 (꿈, 계획도 아니기를 바랬던) 실현되어 그 순간 이후를 사는 나를 괴롭힌다.

나는 옳고, 또 나는 슬프다.

나는 내일을 생각할 수 없고, 한달 후나 일년, 졸업후나 10년후는 꿈처럼 희미하고 잘 꾸어지지도 않는 순간이다.

나는 그 때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선택을하고 결정을 내린다.

그렇다고 아무런 고민도, 견식도 없는 결정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 것들은 모두 선택을 내릴 당시의 나의 상황을 고려한 것일 뿐, 그 어떤 작은 미래에 대한 우려도 들어있지 않았다.

하루살이.

내일은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처럼 하루를 책임지고, 내일을 살지 않을 것처럼 내일을 위한 일들을 벌인다.

내게는 뚜렷한 목표가 없고 나는 꿈을 꿀 수가 없다.

내게 유일한 목표는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며 내가 꿀 수 있는 꿈은 내일 아침에 눈을 뜨거나, 뜨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날이 마지막인냥 최선을 다하고 웃고 울며 때로는 정말 마지막이기를 바라기도 하고,

내일이 있기를 바라는 소망은 어쩌다 한번씩 꿀 수 있을 법한 꿈들 (하늘을 난다거나, 일확천금을 손에 얻는) 같으며

끊임없이 객관적으로 내가 살아갈 세상을 보고, 내가 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나는 학업에도, 사랑에도, 무언가를 느끼고 받아들이고 기록하는 일에 열정적이었다.

그런 나는 몇개의 하루살이로 이루어진 삶을 살게 될지 잘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하루살이들이 모여서 완성된 삶이라는 것 또한 흥미진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지금'을 산다.


201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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