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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Jun 13. 2022

52일 차

2022. 06. 13

Q. 다시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요?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일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 사람을 사랑해봐야, 관계를 맺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이 있듯이, 일 역시도 그 일을 해보고, 그 일 혹은 회사와 관계를 맺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죠. 그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선택이기에 언제나 서툴고,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다시 직업을 선택한다고 해도, 나는 같은 기준으로 선택할 것입니다.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는가, 나를 먹여 살리는 그 과정과 그것에 쏟는 나의 시간이 얼마나 의미 있고 재미있는가. 

아, 그리고 한 가지가 추가될 수 있겠네요. 그 직업이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서 성장시키는가. 모든 일은 개인을 성장시킬 겁니다. 역량의 성장은 한계가 있다고 느꼈어요. 4-5년 하다 보면 일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통달하게 되죠. 그럼에도 그 일에 대해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학습할 의지와 여지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성장은 결국 함께 일하는 관계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여기까지 고려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Q. 학창 시절 당신은 어떤 타입이었나요?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에 꽝 하고 내 삶에 커다란 사고가 일어났죠. 그땐 그런 건지도 몰랐는데, 사고가 과연 순간의 일이었나? 그러면 나는 몇십 년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ㅎㅎ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통틀어 나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는 못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삶은 늘 안전하지 못했고, 위협적이고 불안했죠. 그럼에도 좋은 친구들과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학교 안에서만큼은 나는 상당히 소극적이고, 위축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새삼 내게 대학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동기들과 있을 때의 나와, 학교 밖에서 만난 사람들과 있을 때의 내가 상당히 다른 사람이었던 것도 상당히 웃기면서도 씁쓸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학교 밖에서 나는 반짝거렸고, 학교 안에서 나는 상당히 많은 시간 수치스러웠고, 수치스럽지 않은 척을 해야 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픈 것도 같네요.


Q. 학교 다닐 때 주위에 소문 자자했던 자랑할 만한 재주나 능력이 있었나요?

과 동기들은 나를 PPQ라고 불렀습니다. Post-production Queen(후반 작업의 여왕)이라는 뜻이었는데, 뭐 그게 칭찬인지는 몰라도, 그 대단한 아이들 사이에서 뭐라도 잘하는 게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학교 밖에서 나는 '열심히 사는 애'. 예전에도 말했지요. 나는 하루 최소 4시간에서 9시간은 돈을 버는데 시간을 썼습니다. 정말 안 해본 일 빼곤 다 해본 것 같군요. 일을 하는 곳에서는 '일을 잘하는 애' 였겠죠ㅎㅎ


Q. 그 능력은 어떻게 갖춘 것인가요? 타고났나요, 아니면 노력해서 갖췄나요?

PPQ는 디자인의 영역이었습니다. 살아오면서 내가 갖추게 된 안목과 감각들이 한몫했겠지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된 것은, 10대를 통틀어 집에서 당한 가스 라이팅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잘 감이 안 잡히지만, 나는 항상 살펴야 했고, 누군가 요청하지 않아도 살펴서 필요한 것들을 예측하고, 채워놓거나 해결해야만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일을 함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이나 문제를 파악하고, 헤아리는 센스는 아마 거기에서 얻은 것일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융통성 있고, 지혜롭게 처리하는 것은. 타고난 창의력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예상해봐요.


Q. 그 능력은 지금도 여전히 당신의 장점인가요?

그럴 겁니다. 최근에는 그게 제대로 크게 발현되고 있는 환경 속에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지만요. 눈치를 많이 보고, 눈치가 빠르고, 일이든, 문제든, 사람이든 헤아리고 챙길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방법에 어떤 창의성을 더하는 것. 나는 그것을 평생 쓰게 될 거예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기대한다면, 나는 나를, 그리고 무언가를 더 잘 표현하는, 더 고유한 표현법을 갖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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