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치기

성장통

by 그믐

낮잠에서 깨고난 창밖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비가 온 후의 밤은 땅마저 빛을 반사하여 더 밝다.

몇개월간 일어난 수많은 일들에 음악도 듣질않고 글도 쓰질 않은지가 오래되었다.

무엇이 무서웠는지 드라마 하나만을 잘때까지 켜놓고 산다.

달다가 쓰다가, 미웠다 고왔다를 반복하며 흘러가고있지만 한가지 문제에서만은 나는 저만치 뒤떨어져 우두커니 서있은채 멀어지기를 한달째다. 이러다가는 살아가는 내가 보이지 않던, 멈춰선 내가 보이지 않을테다.

지나고나서야 알게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수만가지와 맞선다.

지나고났으나 도무지 모르겠어서 상처가되는 수만가지와 맞선다.


2월 15일 엄마를 돌려보냈다. 종이와 펜을 가지고 탄 것은 참 다행이었으나, 이번에는 휴지가 없었다.

모든 헤어짐은 아프다.

공항에서 집까지의 세상은 이상한 기분을 선사한다.

내가 돌아올때는 무지개가 뜨더니 엄마가 오는날엔 눈이 내리고 그녀가 돌아가는 날엔 최근들어 가장 예쁜 하늘이었다.

나무도 있고 집도 있고 확 트인 공터도 있다.

그 사이사이로 그리워하게될 기억들이 자리하고, 그것들은 공항이 주는 의미를 둘러싼다.

보내본 적도, 떠나본 적도 있는 히드로. 각기 다른 기억들이 코끝을 시리게 한다.

특히나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집으로 오는 길은 힘들다. 울다가 잠들고 깨어나기를 반복하며 지하철 속 긴 여행에 몸을 싣는다. 함께 올라탄 사람들에게 맘을 얹어볼까 했는데 깜빡 졸다 깬 사이에 누군가는 이미 내려없어졌고, 새로운 사람들이 빈 자리를 채워 마음 둘 곳이 없어진다.

이는 런던 지하철에서 흔히 느끼는 것들이지만, 어디에서 흘러온건지 모를 사람들의 표정만 보아도 그들의 삶과, 한을 읽는다는건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하루에 지쳐 녹록해진 마음들이 모인 퇴근시간 지하철칸에서는 그들이 돌아갈 집과, 가정, 가족과 연인을 상상할 수 없음이 나를 외로움의 공포로 몰아넣을 때가 있다.

반면 한국의 지하철 속에서는 표정만봐도 손만 보아도 알수있는 그들의 하루와 그들이 향하고있는 안식처에 마음과 마음이 팔짱을 끼고 쉬어가곤 한다.

그러한 그리움에, 외로움에, 생각할 수 없는 입장들에 대하여 마음을 담그고 있을 때즈음, 옆자리에 앉은 소녀가 꺼내든 책에 시선이 사로잡힌건 우연이었을까. 혼혈도 아닌 영국 여자아이는 한글로 된 해리포터를 읽다 내가 내리기 바로 전 정거장에 발을 디뎌놓았다. 그 아이가 그 순간의 나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마치 달려가면 만날 수 있는, 맘 속 깊은 얘길 나눌 친구라도 생긴 것 처럼. 나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은 채 그 아일 보냈지만. 그 날 저녁. 내게 찾아온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에 조금 따뜻해졌었다.


수일이 지나고 수주가 지난 일들을 보지않으려 빙빙 맴돌다 어느새 그런 나를 찾아온 현실과 마주친다.

여전히 나는 당황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도망을 치고 때때론 화를 내거나 울기도 한다.

기다려야할지 살아가야할지. 살아가면서 기다리는건 할 수 있을지.

어쩌면 이또한 진정한 사랑을 하고싶다는, 성숙된 삶을 살고싶다는 망상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바라는 일들이 다 이루어지길 바라진 못하더라도, 걱정하는 일만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아이러니에 친구와 나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맘 한구석이 싸해오는걸 막을 수가 없었다.


기다리는 일이 살아가는 일일지, 살아가는 일이 기다리는 일일지,

아니면 그 두가지는 절대로 함께할 수 없는 일일지를 배워가고 있다.

바라는 일들이 다 이루어지길 바라진 못하더라도, 기다리는 것은 꼭 오기를 바란다.

봄이 왔으면 좋겠다.

나무에도 바람에도, 삶에도 사랑에도.

끝난게 아니라 그저 찬바람이 불고 얼어붙어 시리고 아파야 하는 겨울이길 바란다.


언제올지 모를 봄을 기다린다. 겨울이 길어질까봐 걱정이다.


201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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