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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치기

자걍자걍

by 그믐

빗물을 머금은 콘크리트 바닥은 하루의 떼가 묻은 신발 바닥을 만나 쟈걍쟈걍 하는 소리를 내었다. 대상 모를 그리움에 당황하며 오렌지 빚깔의 젖은 밤장판을 응시하며 걸었다. 글이 쓰고 싶었다.

오늘 아침, 나는 뜨뜻하기엔 따스하기만한 샤워물을 쐬며 쪼그리고 앉아 좋았던 느낌에 대해 읊어보았다. 좋아하는 감정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함께보낸 시간과, 알아버린 다름과, 변해버린 마음들에 대한 이야기었다. 시간의 풍화 작용이란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너의 모진 말을 지우고, 나의 어렸던 눈물을 닦아내었다. 이해의 불가능을 덮으려던 무모함을 앞세운 사랑을 달래고 있음의 외로움을 보듬었다. 오래도 지났나보더라. 좋아했던 마음과, 함께했던 시간을 따로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나보더라. 그리고 너는 그냥 좋은 느낌이었다. 처음 내가 너를 만났을 때처럼.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이 아니라, 예뻤던 지난날에 대한 동경이었다. 나는 그렇게 나를 용서하고 너를 이해하고 우리를 잊고 마음을 기억해내었다.

그렇게 시작한 늦은 하루, 무거운 봄비가 버거웠던 것은 나 하나 뿐이랴. 놀아본 적도 없는 꽃들은 하루의 단비로 모조리 씻겨내려갔음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는 많이 잊어버렸다. 불과 작년까지만해도 내가 누구와 어울리고 어떻게 웃고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던 사람이었는지를. 그리고 이렇게 불쑥 불쑥 내리는 봄비에 아주 가끔씩 기억 위로 서린 김을 닦아내었다. 그러곤 하늘을 본다. 좀처럼 헤쳐지지 않을 것만 같은 회색이다. 그러곤 바람을 본다. 좀처럼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은 그리움이다. 나는 지나온 어느날 어느곳에 머문다. 그곳에서도 하늘을 보고, 바람을 보았다. 외로움의 공기를 들이마시어 가슴을 태웠고, 여유의 숨을 뱉으며 행복을 찾았다.

어떻게 삶의 매 순간이라는게 나를 잃어버려야만 시작되는 일인지 모르겠다. 그것은 때론 자비를 베풀어 나로 하여금 어디선가 흘리고온 나를 다시 주워올 여지를 주기도 하지만, 나를 줍는 나도 나이고, 나에게 줍히는 나도 나임을. 나는. 인정하기가 싫었다. 줍고 줍히는 각기 다른 나는 웃지 않는다. 줍는 나는 떨어진 내가 마음이 아팠을테고, 떨어진 나는 주으러 온 반가움이 아팠을테다. 그리움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두렵다. 나는 나를 흘려버린 만큼, 다시 주워담을 만큼만 나다울터였다. 행복할터였다. 나는 그 가늠할 수 없음을 기대한다. 그 속에서 나는 울고, 또 웃고 과거의 살았던 어느 익숙한 날을, 미래에도 살지 않을 어느 낯선 날을. 살아갈 터였다.


2013.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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