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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치기

최선에 대한 짧은 고찰

by 그믐

1. 마지노선

겁쟁이가 될까봐 겁이 나는 것이 과연 용기라고 할 수 있을까? 항상 최선과 무리의 경계에서 발을 헛디딘다. 어쩌면 그것은 위 아래 어느정도의 여지가 있는 마지노선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 어디까지의 무리가 최선에 속할까. 힘들어서 죽어버리지않을 정도? 불행하다는 좌절감에 무릎을 꿇지 않을 정도? 이것에 개인의 관대함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하다.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않아 자신이 다할 수 있는 최선의 한계를 무리의 저 끝 마지노선까지 늘어놓고 최전방에서 장렬하게 싸워보는 것이 과연 용감한 일일까? 해봄직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관대한 것이 겁쟁이라는 것은 또 아닐터였다. 사실 정답없는 질문과 끊임없이 싸우며,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어떠한 선택을 내리며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항상 겁쟁이가 될까봐 겁이 나고, 겁쟁이가 되지 않을까봐 항상 겁이 난다.


2. 스펙트럼

나를 살아가게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쉽게 떠오르지 않은 답에 그저 외면해버릴까도 고민하다가, 좀 더 그 질문앞에 앉아있기를 결심했다. 최근 나의 삶은 그리 각박하거나 절박하지도 않아, 살아내야만 한다는 강력한 무언가로부터의 중력 없이 그럭저럭 별다른 고민이 없었다. 나는 왜 살지? 라는 질문에조차 답을 찾기가 어려웠던 나는, 왜 죽고싶지 않지? 라고 재차 물어본 후에야 조금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경우, 원하는 무언가를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게 있을 것 같은 용기, 에너지와 실제로 발전하고 있는 능력들이 있기에, 구지 살고싶지않다라고 느낄 필요가 없었다. 다만, 원하는 것을 위한 스스로의 최선에 한계가 있을 때 사는게 좀 재미는 없어지겠다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원하는대로 살지 못한다고해서, 사는 것 자체를 못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물리적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결국 사람 심리라는게 사실, 원하는 것을 가지고 안 가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가질 수 있고, 없고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했을 때 불행해보고싶은게 전부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마저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게 싫은 것이었다, 마치 그걸 가지고 싶은게 아니라 그걸 가질 수 있었던 사람인 것 처럼 불행을 느끼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불행해할 수 조차 없음이 싫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를 탄생케한, 신이나 나의 부모는 아마도 내가. 그것을 가질 수 있던 없던 가지지 못함에 대하여 불행을 느끼지 않은 사람으로 자라기를 원하는 것 같은 예감에 그대로 따라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 어떤 물리적 환경으로부터 내 행복이 침해받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그러다보면 나의 최선에 대한 스펙트럼은 점점 더 넓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2013.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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