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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치기

이삿날

by 그믐

나는, '그날밤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겁니다'로 시작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짐을 싸다 아쉬운 마음에 마당의 별들을 헤아리던 그 새벽을. '별 헤는 밤'이라는 문구와 함께 떠오른 것이 윤동주가 아닌 동동주였음에 한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내가 나의 삶을 기억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후로 처음으로 가졌던 나만의 공간. 집. 품. 여기서의 어설픔도 낯섬도 익숙해지고있음과 눈물과 웃음이 베여있는 그 공기가 온 몸을 감싸안았다. 나의 모든 시간과 기억과 마음들이 어디하나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왔다간 많은 사람들, 나누었던 얘기들 목소리들 품안의 따스함과 돌아선 등의 차가움까지도 눈을 감아 검은 밤을 지나치면 그렇게 커다란 창이 세상의 빛을 들이고 그렇게 또한번 참아내고 살아보던 날들이 온전히 다 거기 있었는데. 그런 곳이 떠나라고 하다니. 그래서 잠들 수 없었던 밤이고, 그래서 눈을 뜨기 싫었던 마지막 밤이었다.


심바는 창가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곳곳에 자리를 잡았던 모든 흔적들이 48*38*36 규격의 박스에 채워지는 동안 나풀거리는 먼지를 그대로 쐬면서도 그 아이는 나 대신 그 긴 기억의 필름을 감았다. 나는 감정에 젖어들 새가 없었다. 나이를 들수록 두터운 비옷을 껴입는 마음이 기름종이마냥 감정들을 털어내고 알이 잔뜩 베긴 팔다리는 허겁지겁 카펫계단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집이라기엔 아늑함이 없고, 품이라기엔 따스함이 없던 공간에 묵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높은 천장에 가득찬 낯섬에 한 없이 눈물을 풀어냈던 밤을 기억한다. 또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될까 두려웠던 나는, 누구라도 곁에 있어주길 간절히 또 간절히 바랬다. 내가 언제나처럼 꺼내 트는 인기척은 오래전 방영했던 엠사의 한 드라마였는데, 그것이 한 겹 덜어낸 외로움에 용기를 내어 뱉어낸 숨을, 새 집은 반갑게 받아주었다. 거울에 비치는 창문 때문에 내 방의 숲은 두개가 되었다. 아니 사실, 모든게 두 개가 되었다. 예쁜 방이었다. 내 삶의 흔적들은 새로운 자리배침에 조금은 낯설고 어색해보이긴했지만, 작은 오렌지색 알람시계나 길다란 베이지색 연필꽂이 하늘색 커피잔마저도 얼마후엔 떠나기 싫은 제 집이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항상 그 작은 마당, 봄이면 개나리꽃이 드리워지고 보라색 꽃이 피도록 나무며 마당 곳곳에 노란 꽃들이 꼬리물기를 하던 그 곳, 가을 밤하늘에 반갑게 인사하던 카시오페아 자리는 이 곳의 작은 야드에서도 나를 만나주었다. 곰의 얼굴을 하고 있는 커다란 나무는 지난밤 한차례의 풍파에도 여전히 그 공같은 입을 삐죽이고 있었고 가로등 불빛에 더 붉게물든 단풍잎은 별들과의 수다가 한창이었다.


삼일을 집에서 앓았다. 무엇에 앓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분명 어떠한 앓음이었다. 익숙함과의 헤어짐에 대한 앓음, 새로운 시작에 대한 앓음, 낯섬에 대한 앓음, 혹은.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한 앓음. 더이상 앓지 않기위해 나는 조금 더 실컷 앓기로 했다. 그것은 이사라는 좋은 명분이 내게 준 짧은 휴식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못 다 젖은 마음은, 못 다 젖힌 그 감정들은 찬겨울 붉은 따스함이 만연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2013.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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