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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치기

기억 처리 기간

[항상 더 강해져야하지만, 차가워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우리들에게 I]

by 그믐

때는 오전 4시 24분이었다. 고작 서너시간 도와주고 온 것이 다인데도, 감사함으로 즐겁게 그리고 이 기회가 어떠한 도약이 되기를 조금은 욕심을 내며 다녀온 첫 날이었다. 긴장한 탓에 종일 먹지 못한 배를 어느 좋은 사람의 베품으로 가득이 채우고서 저녁 8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어줍잖은 시간에 깬 나는, 아직 몸 속을 남아 맴도는 듯한 맥주에 휘청이며 냉장고에 오래 묵은 붉은 색 쥬스를 꺼내왔다. 잠은 있는대로 다 깨어버렸고, 이런 저러한 기분에 휩싸이는 새벽의 시작이었다. 일할 때부터 집에가서 봐야지 봐야지 하고 미루던 드라마 한 켠에서, 때로는 끝을 알면서 시작하는 일도 있다 는 말이 흘러나온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은 비단 오늘 뿐이 아니었다. 고무줄같은 인생사에 지칠대로 지친 나는 긴장감에 날이 서있다가도 늘어지기 시작하면 해가 뜨고 지는 동안을 눈을 붙이고 있거나, 주린 배를 외면해버리기도 하고, 부른 배를 학대하기도 했었다. 엉망이라면 엉망같은 그 생활을 나는 그리 한심해하지 않고 흘러보내고 있었다.


2014년의 연말.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채 휩쓸려온 긴긴 시간의 파도를 타다 우리는 연말이라는 이유로, 혹은 핑계로, 혹은 변명으로 새삼 정신을 차리고 눈을 번쩍뜨고 미뤄온 수많은 감정들을 응시한다. 기억의 잔재 처리 기간 같은거다. 감정의 연말 정산, 나이를 먹은 것에 대한 소득 공제같은. 기간인거다. 하지만 뭔가 여느 연말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왠지 지금 처리하는 기억과 감정들을 다시는. 재검토되지 않을 것 같은 이유에서다. 마지막인거다.


나는 요즘 내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미친 사람처럼 헤집어보고있다. 분명 있었을텐데 없었던 것 같은것, 기억이 나지 않는건지 정말 그런적이 없는건지, 진실인지 그저 믿고싶은건지에 대한. 이제는 그만 떠나보낼 기억은 보내고, 복원시킬 기억은 복원시키고. 앞으로의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거름이 될 수 있도록. 이 과정을 통해서 속상해서 울고, 그리워서 울고, 울고 울고 또 울고. 가슴이 저며서 울고, 따뜻해서 울고. 그러면서 편해진다. 게워내거나 솎아내는 것 같은 일이다.


10살때즈음까지 살던 부천의 한 아파트는 5층이 최고층 높이였고, 단수가 잦은 동네였다. 단수가 끝나고 나면 수도꼭지에서 꼭 녹물이 나왔었다. 아파트에는 두개의 놀이터가 있었는데, 나는 그 중에 깻잎이 무성하게 우거진 오솔길을 지나면 나오는 커다란 놀이터를 좋아했었다. 그곳에는 고운 모래 사장이 따로 있었고, 뺑뺑이도 두개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나무와 은행나무로 둘러쌓인 그 놀이터가 내 방 창문에선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5층집에 살았다. 가을이면 온 놀이터가 노란 은행잎으로 뒤덮히는가 하면, 눈이 오는 날엔 소나무에 피어난 눈꽃들이 그렇게 이뻤다. 흑석동에 살던 외할머니는 온수역에서 내려 항상 그 놀이터를 지나서 나를 찾아왔다. 할머니는 그때 밍크 자켓이 있었다. 나는 그 부드러우면서도 뻣뻣한 털 느낌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가을이 되면 할머니는 놀이터를 지나오며 떨어진 은행알들을 주워와서 삶아주셨다. 나는 할머니가 온다고 한 날이면, 항상 놀이터를 내려다보려 내 방 책상 위에 올라가 할머니가 놀이터에 나타나 은행잎과 은행알들을 주워 우리 집을 올때까지 계속 창가에 앉아있었다.


그 당시 굉장히 젊었던 삼촌의 차는 자주색 세피아였다. 삼촌은 차의 보닛을 검은색 덮개로 또 한번 싸고 다녔는데, 굉장히 닌자같았다. 삼촌은 그때 그게 멋있어 보였나 보다. 삼촌 방에 가면 아주 예쁜 종이로 접어진 학알과, 못난이 인형 두개, 그리고 뉴욕 스카이라인에 보트가 이리로 왔다 저리로 갔다 하는게 보이는 파란색 볼펜이 있었다. 못난이 인형은 아마도 내가 어렸을 때 자주 가지고 놀았던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와 같이 살던 삼촌의 흑석동 방에 있는 침대에서 할머니의 흰머리를 자주 뽑아드렸었다. 할머니의 방 장판에는 해바라기 같은 커다란 꽃들이 있었고 호랑이 무늬를 한 담요도 있었다. 무궁화가 그려진 분홍색 담요도 있었다. 엄마는 일을 하고 아빠는 공부를 하느라 집에 없는 날이면 나는 흑석동에서 지내고 있던 어느날이었다. 삼촌은 삐삐보다 더 큰 검은색 뿔테안경을 끼고 정장을 입고 출근을 했다. 맨날 바빠서 쫒기듯이 나가면서도 문앞에서 꼭 멈춰서서 ‘똥깨야, 까까사무라’ 하면서 이천원을 쥐어 줬다. 그때 그 나이에 나에게 이천원이나 주는 사람은 삼촌밖에 없었다. 삼촌은 나를 항상 똥깨라고 불렀고, 나는 삼촌을 항상 태촌이라고 불렀다. 왜그랬는지는 우리도 모른다.


나는 세살때까지 신림동 집에서 살았었다고 했는데, 내가 그 집에 대해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안방에서 동화책을 잔뜩 쌓아놓고 책을 읽고 있었다. 안방에는 자개로 장식된 검은색 장이 있었다. 장롱도 서랍장도 세트였다. 엄마는 그 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는 방 밖에 앉아서 뭔가를 하면서 나를 살피고 있었는데, 그때 내가 큰 소리로 아기돼지 삼형제라는 책을 읽었었다. 아마도 처음으로 내가 뭔가를 읽은 날이었을거다. 그 후로 내가 기억하는 공간은 5층집에 이사하기 전에 부천의 같은 아파트 단지내에 다른 동의 1층집에 살았었는데. 거실 창문으로 볼 수 있는건 온통 우거진 나무와 그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었다. 그때 아빠는 금색 4단 오디오에 스피커 두개가 들어있는 오디오장을 들여놓고 엄청 좋아했었다. 거기엔 테이프가 두개가 들어가고, 씨디가 세개가 들어가며 마이크도 연결할 수 있고 아무튼 우리가 정작 썼던 기능보다 할 수 있는게 더 많았던 똑똑한 놈이었을게다. 항상 8시엔 기상 알람이랍시고 비발디의 사계가 흘러나왔다. 난 그 노래가 거실 창문의 햇볕이랑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 집의 부엌이었을게다. 몇 살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는데 엄마한테 처음으로 편지를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는 고운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연두색 편지지에 편지랍시고 동시를 한편 지어 엄마에게 줬다. 쏙쏙 콕콕 봄이와요로 시작했었나. 거기서 나는 새싹을 계속 색싹이라고 썼었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나를 한참 색싹이라고 불러주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행복한.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었다. 아주 간신히 찾아낸 장면들이기도 했다. 나는 이 장면에 다다르기까지 많은 기억에 비이고 다치며, 원망을 포기하고, 아픈걸 인정하며, 가까스로 가까스로 그리움에 봉착했다. 내가 누가 시키지도 않은 기억의 잔재를 처리하고 있음은, 먼 훗날 나의 아이가 혹은 손녀 손자가 베개를 베고 누워 옛날얘기를 청했을 때를 위함이요, 때로는 끝을 알면서 시작하는 그 저린 삶 속에서 불쌍해지지 않기 위함이다. 맘대로 채울 수 없는 누군가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더 강력한 따스함인 것이다. 그냥 왠지. 지금이 아니면 그 소중한 행복들이 잊거나, 잊지 않을 기억으로 치부될 것만 같았다. 한없이 가벼운 잔재로 남아 바람결에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복원된 기억들은 이제는 그저 나의 일부로서 그렇게 평생을 함께할 것이다. 나는 살아있고,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으며, 그리고 나는 아주 먼 옛날에도 행복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더 강해지기에, 차가워지지 않기에 충분하다.


201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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