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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치기

걱정

by 그믐

바람의 날이 온 몸 구석구석으로 불어들어오는 길가에 놓아진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나는 커피가 너무 먹고 싶었고 그 따스함은 쌀쌀한 날씨를 즐기기에 충분한 온도를 주었다. 나는 푸덕이는 비둘기를 피해 다른쪽으로 몸을 잔뜩 기울인채 불편하게 앉아서 위에 글을 끄적대고 있었다. 기다리던 돈은 통장에 아직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난 필요한 생필품의 구매날짜를 하루 이틀 그렇게 미뤄오고 있었다. 맛이 없지 않은 커피 한 잔 사마실돈이 짧은 몇분의 가을을 완성해주었지만 그것만으로 감사해하며 기쁘게 즐기기에는 지치는 생활이었다. 나는 가난해본 적은 없다. 나는 단 한번도 굶주린 적도 없다. 하지만 굶주릴까봐 걱정하기 시작한지는 꽤 오래되었다. 나의 가족은 날 걱정만 시키느라 굶주렸다. 그리고 어제는 그런 삶에 넌덜머리가 난 어느날이었다.


반가운 얼굴 두 명이 멀리서 나를 불렀다. 나보다도 어린 동생들에게 생일이랍시고 밥을 얻어먹자니 민망하기 그지없었지만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겠지하며 이런 날의 감사를 표했다. 여태 밥한번 제대로 사준 적도 없는 것 같고 그치만 잊지 않으리라 지금한 고생이 언젠가 나를 조금 더 여유롭고 편안한 곳으로 흘려보내준다면 그땐 내 몇배가 되도록 전하리라. 하면서 열심히 먹었다. 아이들은 음악회를 보러간다고 했다. 나는 로얄페스티벌홀 앞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 생각으로 함께 걷자고 했다. 마지막 학년을 앞둔 아이와 곧 여기를 떠나 짧은 여행을 할 아이와 그토록 좋아하는 워털루 브릿지를 걸었다. 그저 걷고 얘기하는 데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찬 바람에도 식지 않을 마음과, 건강한 두 다리와, 여며맬 수 있는 옷가지가 몸을 두르고 있다면 그걸로도 감사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모두가 늘 그러했듯이 으레 다리 중간에 멈춰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었다. 여행을 할 아이는, ‘여기가 그리울 것 같지 않아’ 라며 혀를 삐쭉내밀었고, 마지막 학년을 앞둔 아이는 말없이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나 또한 그랬다.


두 아이의 꼬드김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세계로 돈 한 푼 내지 않고 끌려 들어갔다. 중학교 때 음악시간 수행평가를 위해 찾았던 음악회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함께 내는 소리 속의 개개인의 소리들을 찾아내려 애를 썼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곡들이었다. 나는 비올라와 바이올린, 콘트라 베이스와 퍼커션, 목관악기와 금관악기가 있는 데서 뻔히 들을거라 예상한 곡들을 들을 수 없음에 감사해했다. 그리고 그 웅장함이 굶주림에 대한 나의 걱정을 한순간이라도 날려보내준 것에 또 감사해했다.


고마움을 덤덤하게 표한 뒤, 우리는 가을 바람을 거슬러 각자의 집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생일을 앞둔 나의 통장장고는 일 파운드였다. 나는 걷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충전해둔 교통비가 다 떨어져서가 아니라, 생각을 덜어내기 위함이었다. 또한 나는 오늘도 굶지 않았다. 감사했다. 그리고 감사해할 수 없었다. 걷는 길 가로 펼쳐진 템즈 강으로 약한 마음은 수만번 뛰어들고 또 뛰어들었다.


나는 유학생이다. 분명, 애타도록 이루고픈 것이 있어서 많은 것들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다. 철없던 나에게 엄마는 구세주같은 존재였다. 그때의 나는 굶주림을 걱정조차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보내는 문자메세지, 이메일 한 통은 하나님에게 하는 기도보다 더 확실하고 빠른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런 나의 유학을 등 떠밀어서라도 보내고픈 엄마였기때문에, 엄마는 늘 풍족함과 함께 나는 알아듣지 못할 투정을 보태 나를 짐스럽게 했었다. 그때의 내 걱정은 어떡하면 엄마의 투정을 듣지 않을 수 있을까였다. 삶은 엄마와 나를 하나로 꽁꽁 묶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대자연으로 내던졌다. 폭풍이 휘몰아치는가 하면, 폭염이 오기도 했고, 혹한의 추위를 겪기도 했다. 아무것도 이미 알고 있던 것은 없었다. 또,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어리석게도 모르려고 했다. 엄마는 홀로 홀로 그 예상을 대비했고 이상 기후 같았던 우리네 삶은 엄마의 그 작은 등 하나로 막아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엄마는 굶주렸다. 엄마는 울었고, 엄마는 추웠다. 엄마는 외로웠다. 몇 해가 지나면서 나는 그의 등이 얼마나 작은 것이었는지를, 그의 등으로 막아내려했던 그 고통이 어떤 것들이었는지를 많이 알게되었다.


나는 내 삶에서 엄마를 조금씩 놓아주기로 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내가 엄마의 구세주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힘이나기도 했다. 그러나 스물다섯 내 청춘 앞에, 나는 여전히 한없이 무능력한 존재였다. 무지개가 뜬 지하철 플랫폼에 앉아서 같은 말을 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서 한없이 울었다. 이제는 내게 다 터진 그 작은 등이 보여서였으며, 그리고 거센 바람 앞에 내 작은 등 하나 버젓이 내밀 용기가 없어서였으며, 그럼에도 살아내보자는 지독한 욕망때문이었다. 나는 어느새 유학생이라는 유치한 체면을 버린지 오래였고, 내가 벌 수 있는 만큼이 곧 내가 쓸 수 있는 만큼이라는 것을 배워갔다. 잘 곳이 있고 헐벗지 않아도 되며 오늘 저녁 밥 한끼 먹을 수 있다면 그걸로도 삶은 충분히 행복한 것이라는 겸손한 허세도 갖추기 시작했다. 아마도 나는 그저 엄마라는 구세주 덕분에 화려했던 내 삶에 질려버렸던 거라고 그렇게 믿기로 했다.


살다보면 제 삶에 스스로 질려버리는 날들이 있다. 화려함에 질리기도 하고 굶주림에 질리기도 한다. 만족에 질리는가하면 초라함에 질리기도하고 아름다움에 질리는가 하면 보통에 질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는 굶주릴까봐 걱정하는 삶에 질려버린 순간이었다. 곧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할 순간이기도 했다. 더이상 무능력하지 않기로, 어떻게든 굶지 않기로, 어떻게든 가난하지 않을 의지를 잃지 않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굶주릴까봐 걱정하는 모든 청춘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아직 가난해본 적이 없다고. 가난해지지 말라고. 당신이 굶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가난해지지 않을 수 있다고. 당신을 가난하지 않게 하느라 가난해야했던 분들을 잊지말라고. 우리 이제 그만 그 걱정에 질려보기로 하자고.


2014.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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