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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치기

무제노트 12

by 그믐

반나절의 세찬 봄비에 꽃들이 많이도 바람이 되었다. 일상이 되어버린 자정이 지난 퇴근에서 누군가 열어놓고간 세탁기에 아직 채 다 마르지 않은 세제 냄새가 무언가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내 집이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에 온기가 돌았다. 꽃빛의 밤이었다. 창문 넘어의 이웃집 마당을 탐스럽게 가득채운 두 그루의 꽃나무는 바람이 되어 보낸 제 식구를 떠나보낸 슬픔 때문에 더 아름다워 보이는 밤이었다. 종이새라는 노래는 오는 길을 더 축축하게 만들었다. 나는 축축해진 마음으로 그 꽃나무의 눈물도 집 안 가득 퍼진 세제 냄새도 다 빨아드린 것만 같았다.


아쉬운 표정의 그를 삼켜버린 터널의 어둠은 그 속상함을 곱씹을 새도 없이 다음 역에 도착했다. 돌아갈 수 없는 다음역이었다. 생각은 오해의 촉매같은 순간을 에너지삼아 전속력으로 병렬구조의 회로로 뻗어나갔다. 나는 다시는 그런 순간을 생각으로까지 잇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냥 그렇게 넘길 수 있을거라 믿었던 순간이 생각으로 곱씹히어 속상함이 되었다. 불신의 씨앗은 정말이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것 같다고 달리는 지하철에 생각을 팔았다.


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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