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외로운 얘기들을 꺼낼 곳이 백지가 되어버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시간동안 나는 행운아였고, 구태연하게 마음 속 얘기들을 정리하여 글로 풀어헤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말도 잘 나오지 않는 지금의 나에겐. 연필과 종이, 그리고 이 노트북이 전부이다. 누군가로부터 운이 좋게 채워질 수 있었던 것들을 이제는 나만이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는 때가 다시금 온 것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나의 에너지를 분배하며 생활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아끼어두어야하고, 조금이라도 일정량을 초과했다간 삶이 도미노처럼 무너져내린다. 그 몇십개의 것들을 다시 세우기까지 나는 탈진을 반복하고, 시간을 소모했다. 그리고 사실 내 에너지 통장은 이미 마이너스를 찍은지 오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밤새 할 수 있는 것들이 아침에 할 수 있는 것들보다 많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긴 힘이든다. 그러나 나는 매주 습관처럼 오전 9시에 대영박물관을 가고 12시에 밥을 먹는다. 그리고 그것이 습관이 되는 새로 봄이 와있었다. 얼마전 우연히 윤종신의 탈진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투표를 하러가는 버스안에서 그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 버스는 런던의 온갖 유명명소를 다 지나쳐갔다. 선명한 봄날이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탈진해 있었다고 생각했다. 날 그때처럼 믿어달라는 말조차 못하게끔. 지친 나를 숨기려 옹졸하게 굴었다는 말 앞에 망가진 나를 휘두르던 그 앞에 걱정스럽게 서있었던 이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탈진하기까지가 십년, 탈진한 상태로 버티기를 수년이 지난 것만 같았다. 노래 가사 처럼 잠시 눈을 감고 있는다고 일어서질 것이 아니었다.
좋은 햇살은 좋은 맥주를 부른다. 나는 버스에서 내내 참았던 울음에 목이 탔는지 오후 2시부터 취하길 원했다. 삼삼오오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이 해가 지고 비가 내리고 땅이 충분히 젖고 비가 그치도록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편하지 않은 상태를 버텨낼 에너지가 없었던 나는 다량의 술과 음식을 섭취하며 본의 아니게 일어설 타이밍을 한번, 두번, 계속해서 놓치었다. 내 정신적 에너지는 바닥이 난지 오래였고 맞은편 거울에서는 곧 잠을 청해야 할 것 같은 초췌한 몰골이 계속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모성 이야기들이 오랜 시간을 오고갔다. 사실 무언가를 저축할 수 있기를 기대하기도 힘든 모임이었지만 나는 일말의 기대를 미련처럼 놓지 못한채 계속해서 앉아있었던 것 같다. 혹시나 따뜻한 이야기가 오갈까하여, 혹시나 재미난 웃음이 오갈까하여, 혹시나. 날 그때처럼 믿어줄 사람을 만날까하여, 혹시나. 탈진할 나를 일으킬 만한 힘을 얻을까하여.
모임이 끝나갈즈음 나보다 서너살은 어린 매력적인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사실 언니 오빠들 속에 껴있을때 안전함과 편안함을 느끼는 류의 사람이고 두어살이 넘어가는 동생들을 좀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뻘쭘하게 우연스런 공통점에 대해서 선배인척 떠들어대고 있었다. 막차를 놓치기 싫어 먼저 일어서는데 온 몸에 허하게 바람이 한바퀴 돌아나가더라. 속이 차가워지는 것이 입김이 나올 것만 같고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비가 그치지도 그치지않지도 않은 땅을 쟈강쟈강 걸었다. 울고 싶었는데, 울 힘이 없었다. 며칠전 맥주를 네 파인트나 먹었던 날도 집에와서 한참을 울었는데, 나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내 자신을 원망할 힘조차 잃어버린채 멍하니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눈을 감았다 떴는데 열시간이 지나있더라. 나는 겨우 기운을 차려 가장 마음 가까이 있는 이에게 답장을 하는데 “있잖아, 나 참 초라하다.” 고 했다. 이름을 김초라로 바꿀까하는 우스개 소리를 했는데 사실 ‘하다’ 라는 동사만 빼면 초라라는 단어는 참 예쁜 어감이라고 생각했다. 그 친구에게 말했다. “어제 스물서너살 짜리 애들을 봤는데 저때 난 어땠지 저때 난 뭐했지 나도 예뻤던거 같은데 나도 뭔갈 하고싶었던거 같은데 하고싶은게 있었던것 같은데 지금 나는 뭐하고 있나. 막연하게 나보고 멋있다는 말을 하는 아이들앞에서 지금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나를 발견하고 내가 멋있지 못한 이유를 합리화하는 나를 발견하고. 근데 그 합리화에 쓰이는 말들이 모조리 부정적인 말들인걸 발견하고 부정적인게 아니라 현실적인거라던 누군가의 말도 더이상 위로가 되지 않고 그러는 내가 참 가난하고 불쌍하고 힘들어보이고 날 깔아내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겐 내가 그렇게 보이겠구나 그런 사람들에게 깔아내려지기 싫고 멋있어질때까지 멋있지못한걸 들키지말자 하면서 이악물고 독하게 멋있어지자 아무도 만나지말자 아무에게도 들키지말고 아무에게도 이해받으려고 알아달라고 설명하지말자 나에겐 현실인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부정적인 이야기고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닌 내 안의 타인의 시선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내가 참 답답하고 한심하네 나 비참하고 서럽다 느끼며 산지가 어언 십몇년인데 이거참 끈질기게 길다 나 이뻐해주고 나 믿어줄 사람도 나밖에 없는걸 알고부터는 나만큼은 나에게 그리 말해줬는데 항상 잘하고 있다고 말해줬는데 이제는 더이상 그러면 안될것같아 나 한심한거 맞는거같아 나 초라한거맞는거같아 내가 스물셋부터 사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바뀐게 없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내가 그러고싶어서 그렇게 된건아닌데 내가 안멋있으려고 안멋있는건 아닌데 가난한데 꿋꿋히 버티는게 멋있는건 아닌거같애 절망감속에서 열심히 버티는것도 아닌거같애 버티고 나서 무언가 달라졌을때 멋있을텐데 야 나 사년동안 뭐했을까 사람들앞에서 돈없다 돈없다 하는 것도 나에겐 사실인데 남들에겐 부정적인 거잖아 나에겐 현실인데 남들에겐 가난한거잖아 몸도 맘도 다 지치게 사는데 그건 열심히 사는게 아니라 힘들게 사는 거잖아 그렇게까지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거 내 의지가 부족해서이던 나와 상관없게던 답답하고 한심한거잖아”
그리고 오래전 우리 그런얘기를 했었지. 어른이 된다는건 멋있어지는게 아니라고 말이야. 멋있지 않은걸 인정하는 거라고 했던가. 서럽고 비참하고 구질구질할 때도 있고 근데 그런거 참아내고 덤덤할 수 있는거. 그래서 멋있는거 그게 어른이라고. 그러면 나는 맞게 어른이 되어가는거같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서. 그래 그 어린 친구들에게서 조금은 힘을 얻은 것 같애. 나 처음 영국 왔을 때처럼 그 스물한살, 두살 때처럼 좀 독해져보려고. 마음이 병들지 않게 하려고 많은 힘을 쏟았던 지난 수년이었는데 그래서 독기고 용기고 다 잃어버렸는데 더 자란 나로서 그때처럼 한번 살아볼까해. 그래서 힘든 나, 가난한 나, 한심한 나 아니고 그저 버티기밖에 할 수 없었던 나 아니고, 이겨낸 나, 맞서 싸우는 나, 힘든게 아니라 열심히 사는 나, 부정적이지 않을 정도로 부자인 나, 한심하기보단 차라리 유치할 수 있는 나 해보고싶다. 나의 탈진은 포도당을 맞는다고 몇달간 요양을 한다고해서 나아질 것이 아니라서. 나의 탈진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갖고 싶은 것을 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찾으면서, 그래서 내가 행복을 느껴야 해소가 될 것이라서, 아무런 걱정없이 예쁘게 웃을 수 있는 날 해소가 된 것일테니 그냥 지금은 그때처럼 날 믿어줘.
2016.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