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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치기

다섯개의 출근길

by 그믐

I.

참 별게 다 서럽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위로받을 곳의 부족이라고 생각을 했다. 언제나 사소한 서러움이나 뭉게지는 자존심 정도는 떠안고 사는 인생이라한들 그래도 또 그렇게 웃어넘기고 눈을 뜨는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를 짓밟으려는 수많은 세상에 가시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라는 수많은 위로마저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 런던은 지긋지긋하리만큼 위로보다는 가시의 양이 더 많은 곳. 나는 지긋지긋하리만큼 이리저리 찔리며 찔린 곳을 또 찔리며 아픈 몸을 부둥켜않고 어깨한번 펴보려 애쓰며 버텨보던 것이 오년. 안아픈척도 해보았고 스스로 못난 굳은살을 만들어보기도 했더랬지. 가시를 꺾어보려 통째로 안아보기도 했고 혹은 그 놈이 여려질까 그 앞에서 펑펑 울며 하소연도 해보았더랬지. 그래도. 가시는 가시었다. 나는 나였다. 나는 꿈을 찾아 시작된 그 봄같았던 모험이 눈물 가득한 젊음의 상처쯤으로 남아버릴까 두려웠다. 속상했고. 속상했다. 내가 하얀 살결위로 언제그랬냐는듯 주름을 뒤덮을즈음 그것이 참된 영광의 상처라 미소짓게 될런지는 모를 일이지만 당장으로서는 또 한번 무릎이 꺾이고 내장이 울렁거리는 삶의 고비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The Proclaimers의 Over and Done With를 귓속넘게 울려퍼지도록 소리를 높였다. 세상의 소리로부터 사람의 소리로부터 나를 한없이 가두고 싶었다. 하지만 휴지가 없음에 넘치려는 눈물을 참아보는건 내가 다 가둬지지 않았음으요 혹은 이어폰속 노래가 내 눈까지는 가두지 못했음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의 출근길은 끝자락에 다다르고 있었다.


II.

참 추운 날의 아침이었다. 아마도 이 겨울의 마지막 추위쯤 되어보이는. 많은 시간을 집에서 이불 속에서 보낸 나의 겨울은 안전했고 차갑지 않았으며 기쁘지도 않았다. 원래도 겨울은 그다지 기쁜 계절이 아니었다. 겨울에 기쁜 일이 있었다하면 글쎄 아주 옛날 합격 통지를 한 번 받은 기억 뿐이었다. 나는 진지하게 내가 동면을 하는 동물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좀처럼 날이 추워지면 맥을 못 추스리는게 남들의 몇배는 되어보이는 듯 했다. 몇분을 일찍나왔지만 예정보다 일찍 출발해버린 지하철은 따뜻한 코코아 한잔마저 포기한 나를 차디찬 플랫폼에 내버려둔채 깜깜 무소식이었다. 한정거장을 가기위해 타는 오버그라운드에서 나는 항상 서있는 자리를 정해두었다. 손은 얼대로 얼었고 나는 오랫만에 이런 저런 겨울냄새 묻어나는 생각들이 올라와 자판을 두드려보는 그런 출근길이다. 많은 것이 엉망진창이 되었고 나는 나답지 않게 무리를해가면서까지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아무것도 자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해결하고 싶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그대로 둔 채 홀로 분리되고 싶었다. 먼지가 폴폴 날려 눈이 뻑뻑하고 재채기가 끊이질 않도록 청소를 하지 않았다. 책상 위에 산더미 같이 쌓인 서류를, 구독하는 잡지를 방치했다. 답장을 보내야하는 이메일이나, 새해를 맞이하여 빼곡히 적어보았던 계획 위에도 먼지가 가득 쌓였다. 계절성 우울증도 아닌게 겨울 공포증쯤은 되는것 같았다.


III.

봄은 낮 열두시부터 오후 네시즈음까지 규칙적으로 겨울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것이 병문안인지 회담인지 성격은 모르겠으나 오늘도 어김없이 오전 아홉시의 플랫폼에는 봄의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고, 또 불안함에 떠는 하루를 보낸다. 나 같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에 외로워지고, 또 안도를 하는 하루를 보낸다. 지하철역 나와 같은 열차를 타고 제각기 다른 역에서 내릴 수많은 사람들 틈에 섞이어 나는 춥고 덥기를 반복하고, 위험하다 안전하다를 반복한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둘러쌓여 있고,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것이 새삼. 감사한 날이었다.


IV.

한동안 즐겨듣던 Sou Jorge의 노래가 무심코 흘러나온다. 나는 어떠한 사색에 잠겨 기억의 냄새를 킁킁거린다. 분명. 그 기억은 겨울인데 그 냄새는 여름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묘함에 빠져들었다. 노래는 앨범 자켓처럼 노랗고 동시에 파랗다. 나는 가둬지고싶었다. 가둬진다는 것은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나를 불안에 떨게 할 사람조차 닿을 수 없는 곳에 가둬지고 싶었다. 편안하게 또 안전하게. 따뜻하게 또 평안하게. 나의 이런 푸념에 가둬주겠다는 어떤 이의 농담 속에서 어떠한 기억을 찾아내었다. 누군가에게 가둬져 그 따스한 품 안에서 그 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던. 너무도 견고하여 불안할 틈이 없었던 그리고. 외롭지도 않았던 품이었다. 그래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V.

새삼 지나간 수 해동안 봄이 참 일찍왔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 느리게 왔던 해 중 내가 기억하는건 2013년과 올해 둘 다 학교에서 슬며시 떠나있는 시간이었다. 실로 봄이 늦게온 것인지 혹은 그저 체감하는 것이 늦은 것 뿐인지는 모르나 이월이면 만개했던 꽃들이 사월의 문턱까지 보이지 않는걸 보며 영 내 마음이 어두워 따뜻하지 못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안심을 했다. 벚꽃 축제가 열릴 시간이었다. 분명 그곳에선 벚꽃과 그것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언제내릴지 모르는 단비에 맘졸이며 시한부같은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으리라. 그렇게 몇달이 지나고나면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지 않은채 집을 나서도 완연한 따스함에 춥지 않은 계절이 오겠지.


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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