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만 굵은 나만의 순례길
지하철 3호선 2번 출구로 나서면, 세상은 잠시 느려진 안국역 이다.
북촌 한옥마을이 숨 쉬는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빌딩 숲에 가려진 숨결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 사이로 담벼락이 이어지고, 오래된 나무문 앞엔 여전히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
북촌을 지나 창덕궁 담장을 돌고, 경복궁 뒤편을 따라 서촌으로 접어들면 바람이 조금 달라진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잦아들고, 골목의 그림자가 길어진다.
문득, 어떤 찻집 창문 너머로 혼자 앉아 책을 읽는 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시간 안에 갇힌 사람처럼.
서촌을 따라 조금 더 걷다 보면, 인왕산 자락이 모습을 드러낸다.
흙길이 시작되고, 나무 계단이 오르막을 알린다. 어느새 나는 도시를 등지고 있다.
직업군인이었던 남편과 결혼을 하고 인왕산 근처에 있는 관사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산 밑에 있는 집은 공기도 맑고 새집인 데다 넓고 시야가 확트여서 마음까지 여유로워지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살아보니 출퇴근이 너무 힘들었다.
내가 일하는 곳은 송파인데 지하철을 타기 위해선 마을버스를 타고 안국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번 갈아타야 했다.
재수가 좋으면 앉아서 쭉 문정역까지 가는 거고 운나쁘면 계속 서서 가야 한다.
왕복 출퇴근 시간이 3시간이 넘게 걸리니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있었다.
교대 근무일 땐 두배로 녹초가 되곤 했다.
남편은 군사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갈 수 없다면서 데리러 올 수도 없다는 둥, 신혼 초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두 번째 난 재는 바로 집이 산밑에 있다 보니 등산객들이 집인질 모르고 자꾸 구경을 하러 들어오는 것이다.
어쩔 땐 군인들이 밖에서 어슬렁 거리며 근무 중이라고 할 때도 있고, 여름엔 갑자기 메뚜기 등 무슨 다양한 곤충들과 벌레들이 우리 영역을 침범하곤 했다.
심지어 까치가 베란다로 들어온 적도 있다.
맑은 공기와 넓은 집과 멋있는 풍경은 얻었지만, 포기해야 할 것들도 많았다.
주말이 되면 인왕산에 등산을 오는 사람들로 집 근처는 항상 북적북적거려서 조용히 쉴 수 없었다.
나만의 자유시간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을 정도였다.
그래도 돌아보면 안국역에서 인왕산 집 근처까지 집에 오는 길이 그리 즐거울 수가 없었다.
언덕길이 많이 있었지만 고풍스러운 집들을 구경하는 재미와 운동도 할 겸 지하철 역까지 항상 운동화를 신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주말엔 차를 끌고 동네 순찰을 돈다. 종로도 가고 삼청동, 인사동, 경복궁, 서대문형무소등 전주 촌년이 서울구경을 매주 했다.
이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를 때...
안국역에서 인왕산까지, 나는 한 도시를 걸어온 것이 아니라, 한 마음을 지나온 것이다.
복잡했던 생각들이 걸음마다 조금씩 내려앉고, 그 자리에 고요가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서울 한가운데서, 나는 조용히 나를 만나곤 했다.
바쁜 도시의 중심에서, 잠시라도 멈출 수 있었던 길.
안국역에서 인왕산까지.
그 짧고 긴 여정이 내게 남긴 건, 다시 걸어갈 수 있는 마음이었다.
돌계단에 잠시 앉아 서울을 내려다본다.
멀리 남산타워가 실루엣처럼 솟아있고, 그 아래 복잡한 도심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숨결처럼 움직이고 있다.
그 속엔 나도,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도, 그리고 수많은 하루들이 함께 흐르고 있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조용히 멀어져 있다.
아무 소리도 닿지 않는 고요한 풍경 속에서 나는 오히려 나 자신과 가장 가까워진다.
그리고 나는 안다.
또다시 지치고, 어지러운 하루가 나를 삼키려 할 때면
나는 다시 이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안국역에서 인왕산까지.
짧지만 깊은 나만의 순례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