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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생각 Nov 10. 2019

인연3

제가 쑥그러워서 "사랑해요" 라는 말을 잘 못합니다.








아프시다는 소식에 벼르고 별러서 제주도를 갔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들의 연락처를 달라고 했다. 약해지신 할머니는 허름한 작은 수첩을 뒤적이며 번호를 알려줬다. 마음은 떨렸다. 무어라 나를 아들에게 설명해야 하며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해야 할까?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머리가 복잡했고 그냥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들은 담담히 받았다. 요동하지 않는 목소리는 할머니에게 남아있는 정이 없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환과 치매 3급이라는 병과 싸우면서 독거노인으로 요양병원 몇 곳을 옮겨 다니다가 끝내 할머니는 아들을 만나지 못한 채 하늘나라로 가셨고, 한참을 병원 영안실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는 소식을 그곳 사회복지사를 통하여 듣게 됐다.  조금 있던 땅 관계를 정리하려고 동사무소에서 수소문 끝에 아들은 연락이 되었고 연고자의 허락 후 할머니는 화장을 해서 어디엔가 뿌려진 듯하다. 유일하게 연락되던  사회 복지사에 짜증 섞인 목소리는 일을 처리하느라 힘들었음을 짐작해했다. 상상 속에 할머니는 흐르는 강물 따라서 머나먼 강을 건너 셨으리라.


 1991년 6월쯤이라 기억한다. 큰아이 여섯 살 때 남편의 직장 관계로 제주도로 날아갔다. 어쩌면 기회의 땅이라 생각도 했다. 지금보다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들은 내가 만났던 시골과는 달랐다. 할머니들의 언어는 사투리도 아닌 것이 중국 말과 일본 말 한국말을 섞어놓은 듯 해괴망측하게 들렸고, 알아듣는 척은 제주도를 떠나올 때까지 계속됐다. 지인 결혼식에 갔다가 신랑 어머니의"폭 삭 속 았수다" 말에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이곳에 내가 있음이 신기했고 또한 이곳에서 별일 없이  9년을 잘 살고 뭍으로 올라왔다.


 내가 살던 곳은 서귀포시 J동 나지막한 집과 동네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다. 슈퍼를 들락거리며 33살 나는 애를 키우며 먹고살기에 바쁜 새댁이었다. 아마도 슈퍼 앞 건널목 같다. "저기요 저 서귀포에서 에어로빅하셨죠?". 할머니와의 첫 만남이다. 하얀 바지에 노란색 티셔츠 흰 운동화에 커트머리  일반적인 제주도 귤 따는 할머니들과는 달랐다. 잠깐 주민 센 테 무료강좌였던  에어로빅에서 나를 기억해주는 할머니가 반가웠다.  모든 것이 낯선 이곳에서 나이가 지긋한 어른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쓰윽 내 곁으로 스며들었다. 이렇게 할머니와의 인연은 질기게도 이어져 올해로 30년 째이다.


 그때 할머니 나이 58살. 남편과 띠동갑이라 잊어먹지 않는다.어쩜 생일도 남편과 비슷해서 매번은 아니지만 생각난다. 아들이 할머니라 부르니 할머니였지 호칭도 에 매 모호했다. 마땅한 호칭이 없어서 아들이 부르는 할머니로 불렀다. 전화 말미에 "사랑해요"라고 말은 오글거리고 어색했지만 나는 나대로 사랑도 주고 정도 주며 마음까지 주는 사랑을 슬슬 시작했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고래 힘줄 같은 인연은 할머니와 상관없이  혼자 했을지도 모른다. 물도 설고 말도 설은 이곳에서 할머니에게서 돌아가신 친정엄마를 기대했고,  의지할 친구도 기대했으며 33살 먹은 어린 새댁의 객지 생활을 할머니와 함께하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해보았다. 나이도 달랐고 생각도 달랐지만 동갑내기 친구보다는 편했고, 된장 담고 김장 담그기를 누구보다 잘 알려줄 것 같은 할머니를 나는 친구라 부르며 더 좋아했다. 어쩌다 알게 된 혼자 살고 있는  할머니의 사연들이 때로는 공감해줄 수 없어서 난감했지만 33살의 용량대로 나는 할머니를 이해하려 애를 썼다. 왜냐하면 친구니까. 그리고 이해를 안 하면 어찌하겠는가!  25살 많은 할머니 친구에게 나는 어떤 조언도 할 수 없었다. 모르는 채가 약인 듯 그냥 넘어갔다. 건방지게 할머니 인생을 운운한다는 것이 버릇없어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33살 나로서는 예의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뭍으로 올라왔어도 전화로 안부를 묻고 건강하시길 빌어드리며, 허전한 날이나 쓸쓸한 날.  또 제주도가 그리운 날이면 나는 할머니를 전화로 불렀다. 할머니의 어김없는 목소리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고 그리고  사랑해요"라고 끊는다.


 5년 전 세월은 할머니를 쓸쓸하게도 요양원 신세를 지게 만들었다.  시름시름 늙음과 죽음을 만나는 길로 걸어가신 거다. 나는 할머니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다 알지 못했다. 나만의 짝사랑이 신경질 나서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 돈 한 푼 없어서  작은 땅을  팔아달라고 하셨다는 사회복지사  전화를 받고 나는 다리 힘이 풀었다. 돈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고 어려움을 나한테만은 털어놓으실 거라고  감히 철떡 같이 믿은 거다. 기대와 실망을 혼자 하고 재주를 넘었다. 


 이제 나도 할머니 나이를 넘겼다. 생각해보니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으니 나를 더 사랑해주었을 거다. 나에게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도 있을 거다. 부끄럽기도 했을 것이고 자존심도 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나이에 노후도 걱정이 될 것이고, 이렇게 쓸쓸한 가을이면 호젓했을 거다. 나 역시 이런 어린 친구 있었다면 어찌했을까? 역지사지가 떠오른다. 때로는 고목처럼 때로는 아름다운 여인처럼 느껴졌던 할머니가 스르르 묻어져 버리는 형상을 낱낱이 보고 나니 인생이 허무하기도 하고  부질없는 짓들이 온 사방에 깔려있다. 욕심에 가득한 내 모습도 보이고 영혼마저 시켜 먼 이웃도 보인다. 눈 깜짝할 사이라 말하면 너무 어이없는 시간의 표현이지만 나는 할머니와 30년의 인연이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전화 몇 통하다가 지나간 것 같다. 주위에 아프고 하늘나라로 떠나는 이들이 많다.  떨어진 낙엽도 내 모습 같아서 외면하고 길을 걷기도 한다. 만약에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다면 할머니께 이해나 저해의 말보다는 다시 환생해서 인생을 멋들어지게 한번 살아보라 얘기하고 싶다. 결코 할머니가 원하지 않았던 삶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버릴 수도 없는 기억 속 할머니가 오늘도 아픈 손가락으로 남아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드리지 못한 죄책감까지 더해서 괴롭게 한다. 


 한번 맺어진 인연은 모르는 척 무 잘라내듯 흔적 없이 사라지기는 결코 쉽지 않다. 만남도 중요하지만 헤어짐 역시 너무 중요한 인연들의 잔치로 세상을 살아간다. 더불어 그렇게 힘든 "사랑했어요"라는 말을  할머니께 한 번도 하지 못하고, 할머니의  '사랑해요'라는 말에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저도요"만 했을 뿐 이늠의 주변머리가 야속하고 한심하다. ' 제가 쑥스러워서 사랑해요 라는 말을 잘 못합니다. 이해해주세요'라고 글을 쓰면서도 쑥스러워한다. 오늘 같이 낙엽이 한 바닥인 날. 나는 혼자 연연하는 짓거리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후회가 남아서. 그리고 그리워서.


2019년 11월 10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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