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람생각 Oct 18. 2021

흰머리로 살아가기 7

여전히 어색하다.


꿈을 요란하게 꾸었다. 뒤숭숭한 마음보다는 쌀쌀한 공기와 쓸쓸한 곁이 합하여 고등학교 동창생들을 꿈에서 불러왔나 보다.  보고 싶은 다섯 명의 동창생들과 20살 때 모습으로 티격태격하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감고 누운 채로 또렷하지 않게 보였던 꿈속의 친구들과 퍼즐 맞추듯이 즐긴다. 어느 날 쇼트커트를 하고 나타나 기겁을 하게 만들었던 충숙이, 늘 여성스러웠던 곱슬머리 계영이는 작은 핀을 귀 뒤에 꽂고 어깨에 달락 말락 하게 머리카락을 길렸고, 작은 손에 땅콩 같은 색과 검은색 매니큐어를 번갈아 칠하며 파마머리를 짧게 했던 신애, 보이시하게 단발머리를 쓸어 넘기며 멋을 부렸던 나, 환상 같지만 실제로 있었던 사십 년 전 모습이다. 꿈속에서 천천히 나와 화장실 가려고 몸을 일으켜 세워 화장실 옆 거울 앞에 선다. 부스스한 흰머리는 영락없이 노인이다. 쓴웃음으로 올라가지 않은 입꼬리를 올려보지만 별 차이 없다. 거울을 스치고 화장실로 들어가지 않고 왜 머무르는지, 기껏 잘 살아와 놓고 "세월이 어이없네" 하며 몹쓸 핑계를 대고 서 있다.


1981년 영국 왕세자비 다이애나 헤어가 유행일 때가 있었다. 그 머리 모양을 해본 것이 평생 한번 앞머리를 자른 기억으로 남아있다. 결혼 이후에는 좁은 이마를 드러내고 똥 머리로 묶다가 일상이 지루하고 답답하면 과감히 귀밑 1센티 단발머리로 싹둑 잘라버렸다. 아이들 키울 때는 최고였다. 아침에 머리 감고 툭툭 털면 깔끔하고 상큼했으며 미용에 들어가는 비용도 아낄 수 있었다. 하지만 흰머리가 많아지고 머리숱이 줄면서 염색을 하고 파마와 볼륨에 신경 쓰며, 어깨를 넘나드는 길이로 2년 전까지 고수해왔다. 앞머리는 여전히 자르지 않는다.


10년가량 다니던 미용실은 길가도 아니고 차량한데 간신히 들어가는 골목 안에 있다. 서향 쪽에 자리 잡은 미용실은  늘 빛이 없었다. 연탄난로를 일찍 피워 오전에 가면 연탄가스 냄새가 많이 나서 주로 오후에 갔다. 간판도 조그맣고 옛날 유행하던 머리 스티일 사진들은 색도 바랬다. 눈에도 잘  띄지도 않아서 근처 동네 할머니들이 뽀글뽀글 짧은 파마를 하는 곳이다. 빼빼 마른 주인장과 인연은 대중목욕탕에서 알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흰머리를 기르면서부터는 두피에 파마약이 묻지 않게 신경을 써 주었고, 빠지는 머리카락에 속상함을 함께 나누었던 지인이다. 미용실 주인장은 한 달 전 아들이 차린 호프집에 주방일 한다면서 미용실 문을 닫았다. 문만 닫아걸고 서울로 주방 일을 배우러 가야 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2주 후 본인이 쉬는 날 시간 약속을 하고 머리를 만져주겠다 하니 미장원 바꾸기가 쉽지 않기에 걱정이 늘어졌다. 융통성이 부족한지 다니는 곳만 고집한다.


이참에 단발머리를 해본다. 단발머리는 별 부담 없이 자를 수 있고 파마도 멈출 수 있는 기회 같아서 한 달을 망설이다가 손주 옷을 사는 옷 가게 주인에게 다니는 미장원을 알려달라고 박카스 한 병을 내밀었다. 고맙게도 알려준다. 새댁은 결혼하기 전부터 다니는 미용실이라면서 공유해 주는 마음이 덩치만큼이나 넉넉하다.


굽실거리는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니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여성스러움보다는 남성적인 모습이 보인다.  "괜찮냐고". 멋이라고는 담을 쌓은 남편인 줄 알면서도 그냥 묻는다. 물으면서 남편 머리카락을 보니 드라이를 어찌한 것인지 머리카락이 날아가려 한다.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에센스를 발라주며 "묻지 말아야지" 마음먹지만 돌아서면 또 묻는다. 둘이 살아가니 어쩔 수 없다. 손질하기가 생머리라서 쉽지 않다. 끝에 남아있던 염색 모도 사라졌다. 검은 머리나 흰 머리카락이나 스타일 고민은 똑같다. 머리 손질을 해야 외출을 하는 집안 내력은 칠순이 넘은 큰언니도 화장은 안 해도 머리는 꼭 손질하며, 아들 역시 드라이하다가 머리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감고 출근한다. 나를 볶는 성격들이라  살아가기 힘들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건만 혼자 야단법석이다

.

단발머리는 1센티 차이에도 모양이 달라진다. 드라이도 해보고 구루뿌도 말아보지만  굽실굽실한 웨이브 머리가 멋스럽기는 하다. 그래도 파마약까지 멀리해보자 했으니 한 달 만 참았다가 똑 단발로 시도해 보련다. 조금 긴듯하고 보브 스타일 단발머리는 처음이라서 어색하다.  밥만 먹으면 자라는 머리카락은 흔들리는 마음 따라서 잘리고 볶이고 괴롭지를 당한다.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미장원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바닥에 흩어진 검은색 조금 섞인 흰색의 머리카락은 내 것이 아닌 양 어색하고 어설프다. 빗자루가 눈에 보였다면 쓸어버릴 용기도 난다.





2021년 10월 18일 맑고 춥다. 22개월째 흰머리로 살아가기.


여름에서 가을 없이 겨울이 왔다. 흰 머리카락도 가을이라는 중년 없이 노년으로 갑자기 온 듯 보인다. 말이 그렇지 중년이 없었겠는가! 중년인 줄 모르고 살았지.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간 가을처럼.

작가의 이전글 가을 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