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람생각 Dec 14. 2019

삶 8

 부엌

                                                                                                                                                                                                                                                                                                                                                                                                                                                                                                                         


  



 365일 휴일도 없고 그렇다고 마감 시간이 있어서 문을 닫을 수도 없다. 부엌이라는 공간은 형편이 어려워서도 밥하기 지겨워서도 비애(悲哀) 감으로 충만했다. 답답하면 냉장고 문을 열고 가는 아들도 열어봤자 무엇이 그리 많았겠냐마는 가족 모두의 투정을 받아주는 말 없는 해소 공간이었다. "밥 줘"라며 내 얼굴이 밥으로 보였던 가족과 "어휴 지겨워 "하며 나는 접시가 깨지지 않을 정도로 싱크대에 탁탁 내려놓았다. 한숨과 함께 도도하게 살고 싶었던 꿈은 사라지고 김치 냄새가 가득한 부엌에서 앞치마라도 예쁘게 입으면 해소될까? 싼 앞치마를 몇 개를 걸어놓고 몸부림을 쳤다. 밥벌이해오는 이에게 밥을 차리고 자식에게 밥만 차리다가 인생 종 치는 것 아니냐는 허무함이 몰려와서 김치는 마치 약초 달인 물을 넣은 듯 쓴맛이 났다. 손끝에서 내 마음이 전달돼서 나왔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는 김치찌개에서 어찌 쓴맛이 날 수가 있겠는가!  원인은 그해에 담근 김장 김치였다.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교복 와이셔츠를 빨고 나니 저녁 12시가 되었다. 절여 놓은 배추가 하루 종일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시간이 없었다. 새벽 3시까지 눈은 반쯤 감고 아무런 생각 없이 빨리빨리 하고 자고 싶었다. 새벽 6시에 아들을 깨워서 독서실 차를 태워 보내고, 남편 일을 도우러 세수를 하다 보니 손목에 김치 국물도 제대로 씻지 못하고 잠이 들었던 내가 얼마나 가엾어 보였는지 모른다. 그 김치가 뭐라고 안 담그면 그만이건만, 김치 사 먹는 여자는 싫고, 파는 김치는 가격도 비싸고, 담그려니 가랑이가 찢어지겠고! 삶이 쓴맛이었다. 영 반찬에는 힘이 부친 엄마였지만, 싱크대의 물소리와 함께 마음에 흐르는 사연들을 하수구로 흘려보내려고 애를 썼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며 살았던 내 할머니 내 엄마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삶이 분명히 신산(辛酸) 하고 고단하였을 터인데 활 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보며 모든 것을 한 줌 재가 되듯이 태워 버렸을까? 노인들의 지혜가 갈증 난 나에게 물 한 모금처럼 필요했다.


 여전히 부엌을 하루 종일 들락거린다. 냉장고의 고무 패킹이 닮도록 열고 닫던 아이들은 없지만 밥은 해야 하고, 글을 쓰다가도 힘이 들어서 커피포트가 있는 부엌으로 간다. 여전히  압력솥 '짤 가닥 짤 가닥' 흔들리는 추의 소리에 집중하고, 계란 지단에 넣을 파를 썰면서 매워 눈물도 찔끔 난다. 결혼 후부터 계속해서 샅바만 없지 주야장천 씨름하는 부엌이란 공간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버거웠던 삶의 냄새와 어쭙잖은 반찬 솜씨로 죽을힘을 다해서 밥을 짓던 젊은 새댁의 애잔함이 한껏 묻어있는 공간이다. 지금의 부엌은 나이에 반비례적으로 줄어든 썰렁한 반찬 가지 수만큼 조촐하며 한가해졌고, 웃풍이 센 주택의 북쪽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여전히 거의 없다. 커피 향이 조금 흩날리게 바람이 창틀 사이로 슬그머니 들어오며, 적막감이 외로움보다는 행복감으로 느껴지는 부엌을 망연 (茫然) 하게 쳐다본다.



12월 13일 맑음                                              






















작가의 이전글 삶 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