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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생각 Mar 11. 2020

삶 13

무디어지고 살아진다는 것



 세상살이 풍파는 "내일 찾아뵐게요"라고 미리 전화 주고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어어"하다 보면 어느새 코 앞에 있었고, 크고 작은 일들은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어둠이 내렸다가도 하루 자고 이틀 자고 나면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다" 위무하면서 무디어지고 살아지더라.


저녁밥을 먹고 주섬주섬 치우면 해가진다. 어영부영 망설이다가 주머니 속에 효도 라디오를 넣고 마스크에 스카프까지 동여매고 걸으러 나간다. 따뜻한 날은 몇 명의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추운 날엔 가로등에 비친 뒤뚱대는 내 그림자에 한 번씩 놀라면서 걷는다. 걷는 것조차 겁을 냈던 며칠 전보다는 '그래도 걸을 수 있으니'라고 혼잣말을 한다.



밤공기가 어찌나 시원한지 어둠 속에서 마스크를 살짝 벗어본다. 마스크를 벗으며 눈치 보는 뭐 이런 세상이 있나 싶어 한숨이 절로 난다. 내가 작아 보이고 돌아가는 세상이 힘없어 보여서 그런지 꽃망울을 터트리는 매화가 힘이 센 큰 나무 같다. 방만한 걸음으로 머리를 들어 달도 보고 고개 숙여 돌 사이로 흐르는 강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처럼  흘러갈 거야"라고 꽁당 거리는 마음을 잠재워준다. 돌아가신 엄마가 들려주신 피난시절 이야기. 그래도 "살아지더라"라고 눈물을 훔치던 엄마도 떠오른다. 어둠을 닮던 마음은 집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꽃향기도 나는 듯하고 또 무디어지고 살아질 거라는 큰마음이 생긴다. 잠을 자려하니 걸으면서 스쳤던 생면 부지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다. "어둠이라서 더 반가웠어요. 고단한 몸과 마음이지만 단잠에 드시기를"



2020년 3월 11일 맑음. 봄을 느낀다는 것이 미안하고 사치스러운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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