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그녀의 이름은 뭐였을까?

by 바보

저는 첫사랑의 이름을 모릅니다. 매일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항상 같은자리에 앉아있던 그녀? 아닙니다. 클럽에서 만났냐고요? 그것도 아닙니다. 클럽에는 가본 적도 없습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대학 신입생 환영회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4년의 시간을 그녀와 함께 했습니다. 그냥 같은 캠퍼스에서 4년을 보낸 정도의 흔한 인연이 아니었습니다. 둘은 과가 같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과목을 함께 수강했습니다. 둘 다 지방에서 올라와서 기숙사 생활을 했기에 종종 밥도 함께 먹었고, 등교와 하교를 종종 함께했으며, 심지어 동아리 활동도 같이 했습니다. 강의시간 이후에는 함께 과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주말엔 같은 교회를 다녔고, 방학 땐 선교도 같이 갔습니다. 그래서 사귀었냐고요? 궁금하면 500원... 농담입니다.


저는 소심쟁이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대마왕 소심쟁이였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마냥 가지고만 있었어요, 무려 2년 동안. 마음이 점점 자라나니 매일 밤 그녀의 꿈을 꾸게 되더군요. 꿈이란 게 의도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 꿈에서 문재인 대통령님을 만나고 싶어서 '문재인'을 100번 외치고, 1시간 동안 묵상하고, 침대에 누워 문재인 대통령님의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스르륵 잠들었다고 한들 꿈에 나오겠습니까?(아.. 왠지 이렇게까지 하면 꿈에 나올 것만 같네요..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이게 아닌데..) 반대로 꿈을 꾸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멈춰지는 게 아니더군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제 꿈에 나와서 사랑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 학교에 가면 여자 사람 친구인 그녀를 만나는 거죠. 이게 미칠 노릇입니다.


계속 꿈을 꾸다 보니 어떻게든 해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 그러면 병나겠다 싶더라고요. 밤이 되면 그녀를 떠올리며 노래를 흥얼거렸어요. 매일 밤 눈물로 베개보를 적셨죠. 카타르시스가 뭔지 알겠더군요. 마음이 차올라 가슴을 가득가득 채워서 갑갑했었는데 노랫가락에 감정을 실어 조금씩 내보내다 보니 다소나마 해소됨이 느껴졌어요. 그런데 이것이 계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공동생활을 하는 기숙사에서는 지켜야 할 규칙과 매너가 참 많으니까요. 옆방에 들리면 안 되니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날숨에 슬쩍 흘린다는 느낌으로 노래를 따라 불러요. 흥얼흥얼 웅얼웅얼 거리며 감정에 취해 눈물을 찔찔 짜고 있는데 방동생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며, "형 뭐해요?" 그러면 애써 쌓아 올린 감정선이 와르르 무너져 내립니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도 아니고, 마음껏 감정에 도취되어 노래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에요. 그래서 생각한 게 부치지 않을 편지였습니다. 언젠가 그녀에게 전하리라 생각하며, 자신감이 추락한 날에는 나중에 태워야지 생각하며 편지를 쓰고 또 썼습니다. 편지지를 고르고,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고, 서랍에 넣고, 또 편지지를 고르고, 쓰고, 서랍에 넣었어요. 그렇게 1년이 지났더니 서랍이 가득 차 버렸어요. 내 마음도 가득 차서 숨이 막힐 지경이 되었지요. 결국 쇼핑백에 담긴 100통 정도의 편지를 건넸습니다. 멋있게 준 것도 아니고, 시뻘건 얼굴을 하고 잔뜩 쭈뼛거리다 불쑥 내밀었죠. 앞서 대마왕 소심쟁이라 소개한 이유를 알겠지요?


결과가 궁금하십니까? 말하지 않을래요.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생각해요. 첫사랑의 본질은 대상과 결과에 있지 않고 감정의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가슴앓이하는 그 시간에 있다 생각합니다. 마음을 받아 줬는지, 그래서 사귀었는지, 그래서 손은 잡았는지, 그래서 진도를 어디까지 뺐는지, 이런 류의 것들은 적어도 첫사랑에 한해서는 하등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편지를 받아 든 그녀의 반응이 궁금한가요? 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나 혼자 마음을 백두산만큼 키웠는데 마음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이냐고요?

네, 맞아요. 차였습니다. 시원하게.

"푸훗, 나중에 니 결혼식에 들고 가야겠다, 푸훗"

대충 이런 반응이었어요.


너무나 오랫동안 남사친 여사친으로 지냈었고, 철저하게 티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차일 것을 예상했어요. 차이고 바로 다음날 강의실에서 그녀를 만날 생각을 하니 아찔해서 고백하는 날은 금요일 저녁시간으로 정했더랬습니다. 금요일 해 질 녘,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 사이 공터에서 시원하게 차였고, 기숙사로 돌아온 저는 펑펑 울었습니다. 기숙사 방동생은 MT 가고 없었고, 저는 홀로 울다 지쳐 잠이 들었습니다.


토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마음이 갑갑했습니다. 그래서 남산에 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높은 곳에 오르면 좀 답답함이 덜할까 싶어서요. 지하철을 타고 이어폰을 귀에 꼽고 노래를 듣는데, 가사에 마음이 격하게 반응하며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서 당황했고, 황급히 이어폰을 빼야 했습니다. 남산에 도착해 걸어서 오르기 시작했는데 사람이 너무 없었어요. 중간쯤 가니 저 혼자 걷고 있더군요. 혼자임을 자각하니 또 눈물이 후드득, 마주오는 사람이 저 멀리 보이면 좀 그쳤다가, 지나치면 다시 후드득.


정처 없이 떠돌다 저녁이 되어서야 기숙사에 돌아왔어요. 아무리 슬퍼도 배는 고프더군요. 마음이 시커멓게 타들어간 날이니 자장면이 좋겠다 생각했어요. 기숙사 식당에서 자장면을 먹으며 눈물이 또 후드득. 눈물과 자장면과 단무지가 한데 어울린 식사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습니다. 그녀였습니다.


편지를 다 읽었고, 진심이 전해졌고, 그래서 지금 만나고 싶다 했습니다. 짝사랑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랬던 그 순간이니 기적 같은 순간이라 표현해도 좋겠습니다.


우리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끝이 났습니다.

또 궁금하신가요? 어떻게 사랑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사귀었는지, 그렇게 많이 좋아했는데 왜 헤어지게 된 건지 궁금한가요? 그리고 그런 그녀의 이름을 어떻게 모를 수 있는지 궁금한가요? 궁금하면 500원.




















하하하. 농담입니다. 맞아요, 저는 아재 개그를 사랑하는 아재 맞습니다. 하지만 첫사랑의 추억을 팔아서 은근슬쩍 유료 서비스를 유도할 만큼의 자본주의 신봉자는 아니랍니다. 다만 그녀와 함께한 사랑의 시간을 기록하기가 영 내키지가 않을 뿐입니다. 아마도 제가 여행기를 기록하지 않는 이유와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그 시간을 제대로 기록할 자신이 없어서 기억 속에만 담아두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이 말을 하고 나니 첫사랑 그녀가 했던 그 말이 떠오릅니다.


저는 과외를 여러 개 하고 있었고, 때문에 도저히 2박 3일의 시간을 낼 수 없어 졸업여행을 함께 가지 못했습니다. 과외를 마치고 밤이 되어서 문자를 보냈어요. 여행 잘하고 있는지, 사진은 많이 찍었는지 물었죠. 여자 친구는 해변을 걷고 있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다 했어요. 대신 눈과 귀에 담아 가겠다, 그래서 너에게 온전히 전해주겠다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말을 20년 동안 잊지 못하고 있네요.


나라는 사람을 만든 수많은 생각들이 있겠죠.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생각들이 있을 겁니다. 인격의 코어를 형성하는 생각들은 마음의 파장을 만든 큰 사건 사고가 만들어요. 마음의 토네이도라 말할 수 있는 사랑은 그만큼 우리에게 많은 유산을 남기게 마련이죠.

제 첫사랑 이름은 송민순이었습니다. 민순이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개명을 했습니다. 저는 민순이를 좋아했기에, 그 이름 '민순'도 너무너무 좋아했어요. 촌스러운 느낌의 이름이라는 건 저도 아는데, 그 어떤 세련된 이름보다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웠어요. 그래서 이름을 뭘로 바꾼다 했는데 저는 한 번도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어요. 아마도 마음으로 밀어내고 있었나 봅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부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개명한 이름이 뭐였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거든요. 고작 두 글자밖에 안 되는 그 이름이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지고, '세련되고 흔한 이름이었지' 하는 느낌만 남았습니다. 더 이상 '민순'이란 이름은 그녀의 것이 아니지만 부득이 민순이라 칭하겠습니다.

민순이가 저에게 남긴 유산은 '아름다움은 담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사진으로도 글로도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있지요.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참 아름다운 기억입니다. 그래서 글로 담을 수 없었어요. 내 삶에 많은 흔적을 남긴 민순이의 소식이 늘 궁금했습니다. 잘 살고 있는지, 결혼은 했는지, 어떤 남자랑 결혼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아이는 민순이를 닮았는지 궁금하죠. 너무너무 궁금합니다. 그래서 페이스북으로 검색해볼까 했는데 민순이의 진짜 이름을 모르니 '세련되고 흔한' 이름 몇 개를 떠올려보다, 그만뒀습니다. 송수현? 송지현? 송현지? 송현아? 송현아가 뭔가 입에 착 달라붙는데, 혹시 이건가? 아니구나.. 송도 현대 아웃렛의 약칭이었구나..


민순이는 참 착했어요. 그러니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고 있을 거예요.

제가 민순이를 잘 아는데, 민순이라면 스무 살의 민순이로 기억되기를 바랄 거예요.

그러니 걱정도 말고 궁금해하지도 말고 스무 살의 민순이로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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