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de Kim Aug 03. 2021

엄마의 독백

미운 아기오리 프리퀄

 나의 사랑아, 어떤 좋은 꿈을 꾸고 있니? 언젠가 알을 깨고 이 세상에 나올 너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엄마의 행복이며 일상임을 너는 알까? 그런데 아무래도 너를 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날 듯싶구나.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어서 그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던 그 결단을 오늘은 꼭 내리리라 굳은 마음을 먹었단다.


 지난 얼마간은 통증도 사그라들고 기침도 잦아들면서 일말의 희망을 품기도 했었단다. 그런데 그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기가 태어나는 내 생에 가장 기쁜 날이 될 것이 분명한 바로 그날이 엄마에게는 허락되지 않음을 오늘 아침 눈을 뜨면서 알게 되었거든.


 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남아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며 마음에 남아 있는 말들을 쏟아냈던 그때를 떠올려 본다. 엄마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굳게 다져도 모자랄 판에 왜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지, 나를 이 세상에 홀로 두고 떠난다는 말을 저리도 쉽게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거든. 며칠 지나지 않아 무지개다리 너머로 떠나보낸 그날에도 남겨질 내 처지가 막막해서 할머니의 죽음을 오롯이 애도할 수 없었던 것 같아.


 이제와 돌이켜보니 생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음을, 그래서 남아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음을 할머니도 느꼈겠다 싶어. 단지 '느낌'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분명한 그 느낌 말이다. 포박하고 압도하며 순간순간 조여 오는 죽음 앞에서 도저히 저항하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겠다 싶어. 들판에 핀 들꽃 한송이가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이겨내려는 노력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겠니? 체념이나 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리를 말하는 거란다. 공포와 두려움이 아닌 경외와 겸손을 말하는 거란다.


 나의 사랑아. 너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수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묻어야 하는 엄마의 마음을 너는 알까? 겸허하게 죽음을 끌어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한켠에 남은 미련은 너에게 못다 한 이야기란다. 수많은 이야기 중 단 하나를 너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그 해 여름의 이야기일 거야. 오리 친구들과 함께한 그날의 이야기. 


 오리를 '친구'라고 표현하는 게 이상하니? 맞아. 백조 마을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에는 오리를 친구라 부르지 않음은 당연했어. 그리고 지금도 대부분의 백조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아무 곳에나 자라라는 잡초처럼 어떠한 의미도 없었던 오리들이 내 삶에 크고 중요한 부분이 되었던 기적 같은 그날의 이야기를 네게 꼭 들려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함이 끝끝내 미련으로 남는구나. 

 

 그 해 여름, 어쩌다 마주친 오리 무리의 첫 느낌은 늘 그렇듯 불쾌함과 꺼림칙함이었어. 밥 먹다 돌 씹는 그런 느낌 있잖니. 그런데 그날따라 살짝 꼬인 생각이 들지 않겠니? 오히려 다른 동물들에게는 관대하면서도 유독 오리에게만큼은 확실한 선을 긋게 되는 건 왜 그런 건지 모르겠는 거야. 오리한테 무슨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거나 그런 비슷한 이야기라도 들었다면 몰라도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밀어내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는지 모르겠는 거지. 그래서 엄마는 용기를 내서 오리들에게 다가갔고, 그 용기가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었어. 


 오리들과 함께 지내며 알게 된 당연하면서도 놀라운 사실은, 우리 백조들과 오리는 굉장히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이었어. 우리 백조 무리가 오리 무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유도 어쩌면 너무 닮아서 일지 모르겠단 생각도 했어. 오히려 개구리라면 귀엽다며 졸졸 따라다니고, 말이나 소가 지나가면 꼭 등에 올라타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의 백조들이 있잖니? 그렇게 누구와도 잘 어울릴 것 같은 백조들도 오리만 보면 어떻게든 마주치지 않으려고 가던 길을 돌아간단 말이지. 백조 마을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에는 오리들의 성미가 나쁘거나, 고약한 냄새를 풍길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었던 것 같아. 오리 무리와 함께하는 동안 성미가 고약하고 악취를 풀풀 풍기는 오리는 단 한 마리도 만나지 못했는데 말이다. 반면 친절하고, 소탈하고, 솔직하고, 재미있고, 재기발랄하고, 매력적인 오리는 참 많이 만났지. 


 재미있는 게 뭔 줄 아니? 우리 백조들이 알게 모르게 아래로 보는 것을 오리들은 다 알고 있었단 거야. 오리 사회에서는 거의 상식으로 통했어. 그런데도 오리들은 불쾌해하기는 커녕 그럴 수 있다며 다들 그러려니 하는 거야. 엄마가 슬쩍 오리 무리에 끼어들었을 때도 누구 하나 별다른 티를 내지 않았어. 난 내가 끼어든 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줄 알았다니까. 나중에 물었더니 별난 백조라고 생각은 했었다네. 다만 무안할까 봐 하나 같이 모른 척했다니 놀라우면서 고맙고, 고마우면서 민망하고 그랬지.


 내 삶의 끝이 가까워온 지금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순간이 그때가 아닌가 싶어. 그 해 여름. 내가 그곳에 있었음이 뿌듯해서 가슴이 뻐근하다 표현하면 어떤 마음인지 이해할까? 아마 경험해보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이겠지. 그러니 구구절절 너에게 이야기한다 한들 큰 의미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때 용기 내지 못했더라면 알지 못했을 그 세상을 너에게 꼭 보여주고 싶구나. 비록 운명이 허락지 않아 너와 함께하지 못하지만, 너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하는 게 엄마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점점 자라나기만 할 뿐 사그라들지는 않는구나. 그러면서도 지금껏 망설였던 이유는 단 하나, 두려움 때문이야.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가슴 뻐근한 행복을 놓칠 뻔했던 기억을 되새기며, 너를 오리 둥지에 놓고 오려한다. 멋진 세상을 창조하고, 사랑스러운 너를 창조하신 그분께서 너와 함께할 것을 믿기 때문에. 또 오리 무리와 함께했던 그 시간이 나에게 보석과 같은 시간이 되었음을 기억하기 때문에. 


 백조 마을에서 태어나 백조들과 한평생을 살다 이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 그게 나쁘다 생각하지도 않아. 순조로운 항해를 마다할 선원은 없을 테니까. 다른 누군가라면 당연히 순탄한 항해를 권하겠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너라면 다른 마음이 드네. 엄마가 보고 경험한 그 멋진 세상을 꼭 경험하기를 바라게 되거든. 그게 부모 마음인 것 같아. 내가 가진 최고의 것을 주고 싶은 마음.


 아가. 백조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지라는 당부는 하지 않으려 한다. 너에게 흐르는 피가 백조의 피인데 그 피가 어디 가겠니? 오히려 오리가 되려는 헛된 노력을 하진 않을까 염려될 뿐이다. 사춘기 시절에는 다른 누군가가 되기를 바라는 헛된 마음을 품는 경우가 흔하니까 말이다. 만일 그렇다 해도 큰 염려는 하지 않으마.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하는 거니까. 아픔을 통해 성장하는 시기를 사춘기라 부르는 것이니 말이다. 다만 나와 다른 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멋진 백조가 되기를 바라고, 그래서 멋진 세상을 마음껏 느끼고 경험하기를 바란다. 


 더 늦기 전에 너를 떠나보내려 해. 화창한 날도, 비 오는 날도 있을게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늘 엄마가 저 하늘나라에서 지켜보고 기도할 테니 한번뿐인 삶을 멋지게 살아내기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편협함에 대한 구구절절한 변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