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치안
종교를 가진 사람은 물론이고 무신론자에게도 종교는 다양한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특히 무장 테러집단의 무시무시한 테러 뉴스를 주로 접하게 되는 이슬람교가 국교인 나라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말레이시아의 국교는 이슬람교이다. 하지만 중국계, 인도계, 말레이계, 토착 민족까지 다민족이 함께 살아가는 만큼 종교 또한 각 민족의 대표 종교인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함께 공존한다. 본 화에서는 쿠칭에서 볼 수 있는 각 종교의 모습과 치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제임스브룩 때부터 잠깐의 일본의 통치기를 제외하고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쿠칭이 포함된 동말레이시아에는 인구의 30% 이상이 기독교 신자이다. 처음 쿠칭에 도착해 차창 밖에 무수한 십자가를 보며 여기가 이슬람 국가가 맞나 의아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톨릭, 성공회, 침례교, 감리교 등 장로교를 제외하고 신교와 구교 모두 신자가 많다. 기독교 신자인 필자에겐 너무나 감사한 일이고 모든 만남이 축복이었다. 필자가 다녔던 현지 감리교회인 'Trinity Methodist Church'는 영어, 중국어, 바하사 예배를 모두 제공했고 어린이 예배가 따로 있어 필자의 아들이 좋은 교회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필자가 만났던 쿠칭의 기독교인들은 매우 겸손하고 신실했으며 친절해 간간히 욕을 들어먹는 대한민국 기독교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쿠칭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으로 부활절과 크리스마스가 주 공휴일이고 그 외 다른 주에서는 크리스마스만 공휴일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가족과 친구들이 모이는 시기로 생각한다. 쇼핑몰 또한 형형색색의 트리와 장식으로 축제 분위기를 더해준다. 기독교가 전해준 서양의 사상과 풍습들을 생활 전반에서 느낄 수 있어 가끔은 여기가 동남아시아인가 서양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많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의 종교로 다양한 정파와 해석이 나뉘어 있는 우리와 달리 '석가모니의 가르침 이외에 일체의 해석을 불필요하게 여기는' 상좌부 불교'라 불리는 불교를 믿는다. (보통 우리는 소승불교라 부르나 소승불교는 대승불교 측에서 임의로 붙인 명칭임) 우리나라 불교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구제와 참선을 중시하고 착한 행위를 통해 윤회한다는 사실을 믿기에 필자가 만난 대부분의 불자들은 친절한 경우가 많았다.
쿠칭의 절들은 중국계의 종교답게 붉은색이 많이 쓰였고 매우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우리에게 있는 석가탄신일을 웨삭데이(Hari Wesak)라고 부르며, 석가모니의 탄생과 열반을 함께 기리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에게 불교가 미치는 영향은 웨삭데이다. 국경일로 말레이시아 전역에서 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말레이시아 불교 역시 살생을 금하기 때문에 많은 불교신자들이 채식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채식주의자를 위한 음식이 발달했고 채식음식만 파는 코피티암(오픈에어 레스토랑)도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도계 말레이시아인이나 인도인 노동자들이 많아 말레이시아 전역에는 힌두교 사원이 많이 있다. 힌두교도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지만 많은 힌두교도들이 돼지고기 또한 먹지 않는다. 많은 힌두교도들이 채식을 즐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힌두교의 새해 축제는 '디파발리' 또는 '디왈리'라고 불린다.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있는 '빛이 어둠을 이긴다'는 주제의 새해 축제로 필자가 거주했던 쿠칭에서는 국가 공휴일로 쉬지 않았지만 인도계가 많은 말레이시아 다른 주에서는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힌두교가 말레이시아에서 사는 외국인의 일상에 끼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쿠알라룸푸르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말레이시아 힌두교 최대 자연사원인 BATU CAVE나 화려한 힌두교 사원은 아이들과 다른 문화 이해를 돕기 위해 방문해보기를 추천한다.
무장테러 단체에 관련된 뉴스를 주로 접했던 이슬람교에 대해 두려움이나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필자 역시 폭력적이고 무서운 집단이라는 생각에 말레이시아 여행조차 꺼렸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는 2017년 1월 우연한 쿠알라룸푸르 여행을 계기로 편견은 완전히 깨졌으며 오히려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하는 이슬람의 교리 덕분에 일상생활이 안전하다고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위험한 곳에 일부러 찾아가지만 않는다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교의 교리 때문에 쇼핑몰 푸드코트나 호텔 식당 등 팬시한 곳에서는 돼지고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논 할랄' 식재료를 파는 마트에서 돼지고기를 살 수 있으니 돼지고기를 먹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쿠칭은 무슬림의 비율이 다른 도시들보다 적고 중국계와 가톨릭의 영향을 받은 소수민족이 많아 코피티암, 슈퍼마켓, 식당 등 어디서나 돼지고기를 찾아볼 수 있다. 필자가 좋아했던 식당 중 'Oink'라는 식당은 다양한 서양식 조리법의 돼지고기를 파는 식당이다. 특히 쿠칭에서는 '꿀꿀'을 가게 이름으로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돼지고기가 타부시 되지 않는다. 심지어 사라왁의 소수민족 Dayak (다약족)은 우리나라에서 먹는 돼지 내장(곱창, 막창)을 양념해 바비큐 해 팔며, 돼지 귀와 코 바비큐는 별미 중의 별미이다.
이슬람교의 최대 행사 '라마단'( 무슬림들의 한 달 동안 금식기간)은 외국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슬람력 다섯 번째 달에 한 달간 금식하는 라마단 기간에 무슬림들은 해가 떠있는 시간 동안 물을 포함한 어떠한 음식도 섭취하지 않는다. 독실한 무슬림들은 아이들도 라마단에 동참시켜 학교에 등교해서도 아무것도 먹지 못하며 수업에 참여하는 아이들을 보았다.( 체육 수업 후 목이 마르지만 물을 마실 수 없어 우는 아이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데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이 기간 금식 시간 동안에는 무슬림 앞에서 음식을 섭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을 예의로 여긴다. ( 사우디와 같은 강성 무슬림 국가들은 외국인도 야외에서 음식을 섭취하면 처벌한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하지만 예의는 예의일 뿐 무슬림들이 금식하는 동안 외국인들이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것에 제재를 가한다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란다. 오히려 해가지면 식사를 할 수 있는 라마단의 특성상 더 많은 푸드 바자가 열리고 식당들도 앞다투어 다양한 메뉴를 내놓는다. 다만 해가지면 무슬림들이 앞다투어 식당으로 나오니 이 기간 원하는 식당에 가고 싶다면 미리 예약하거나 해지기 전 시간에 이용해보자.
무슬림들은 라마단이 끝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하리라야'라는 이슬람 최대 명절이자 가장 큰 축제를 즐긴다. 가족과 친구를 방문하고 음식을 나누고 무슬림 친구들이 비무슬림 친구를 집에 초대하는 오픈하우스 행사까지 무슬림은 물론 비무슬림들도 축제의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하리라야 역시 국가 공휴일로 며칠간의 연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