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그 무엇보다 육아라는 일상의 고통을 수행처럼 끌어안은 방식으로
위 영상은 AI 입니다
낡은 소파 위, 구겨진 정장 바지 위로 아기가 잠들어 있다.
아기를 감싼 그의 팔은 이미 몇 시간을 지나온 사람의 자세다.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무릎 위의 생명을 감싸며 — 그는 아주 조용히 무너지고 있다.
그의 무너짐은 피곤이 아니라,
‘견딤’의 형상이다.
남자는 눈을 감고 있지만,
그의 품 안에 잠든 아기는 무량한 신뢰로 그 품에 안겨 있다.
그 옆 소파의 여성은 아이를 품고 있지만, 카메라를 등지고 있다.
잠든 자와 깨어 있는 자
정면과 측면, 안음과 놓음
육아라는 반복의 윤회 속에서,
이들은 형태를 갖춘 자비(有相慈悲)가 되었다.
그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 無功之坐(아무런 결과를 바라지 않는 앉음)의 자세에 있다.
이 자세는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동시에 수행의 정점이다.
아이를 위해 기댄 자세는
계산 없는 자비의 표현이고,
껴안은 품은
형상이 된 無상(無相)의 자비이다.
단지 삶의 중심을 붙잡기 위한 '직심(直心)'의 반복이다.
피곤한 아버지는 무너진 존재가 아니다.
그는 지금,
자신을 비워내는 비구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눈은 감겼지만, 마음은 깨어 있다.
아기는 잠들었지만, 품은 살아 있다.
이 영상은 ‘자비’라는 이름의 수행이,
어떻게 한 남자의 무릎 위에서 태어나는가를 보여주는 필름이다.
우리는 이 장면을 ‘기록’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장면 앞에 무주(無住)의 마음으로 앉아,
무너짐과 견딤, 지속과 단절, 그 윤회의 맥박을 함께 견디고 응시할 뿐이다.
카메라란 결국,
형상의 이면에서 ‘無相의 진실’을 비추는 감로(甘露)의 거울이며,
분별심을 벗고 자비로 깨어 있는 직관의 도반이다.
어떤 성취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앉음.
그는 자지 않는다.
그는 지금 보살행의 자세로 ‘일체중생’을 품고 있다.
그의 멈춤은 곧 지(止)이며,
그의 안음은 곧 관(觀)이다.
이는 곧 지관쌍운(止觀雙運)의 살아 있는 형상이다.
그의 품에서 잠든 아기는
무분별지(無分別智)로 태어난 자비의 현현이고,
그 잠든 호흡은
一切行無常(일체 행위는 무상하다)는 삼법인의 파동처럼 흐른다.
그 사라짐조차 무심하게 품는 자비의 등불은,
이 영상의 숨은 이름이며 —
우리 태도의 근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