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그 무엇보다 보지 않음으로 보는 방식으로
위 영상은 AI 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무시(無視)의 경계에서 행하는 수행입니다.
카메라는 대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주변을 흐리며,
눈동자 안의 침묵을 마주하도록 이끕니다.
이 응시는 감정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존재 자체로 감응하며,
지각 이전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빛이 없는 공간,
정면으로 응시하는 한 눈동자.
그 안엔 울림도, 눈물도, 서사도 없습니다.
다만,
형상 이전의 ‘기미(機微)’가 망막 위에 어른거릴 뿐.
응시란 결국,
소리 없는 고백이며,
침묵이 가장 깊은 진실이라는 증거입니다.
정지된 프레임 vs 살아 있는 눈의 진동
빛을 품은 망막 vs 어둠 속 침묵의 중심
응시하는 자 vs 응시 받는 자
이는 즉비시(卽非視)입니다.
본다는 작용이 이미 망상(妄想)임을 자각한 눈.
그 눈은 세계를 포착하지 않습니다.
다만, 비견(非見)의 방식으로 존재와 비존재를 함께 응시합니다.
이 영상은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응시입니다.
하나의 눈동자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공관(空觀), 가관(假觀), 중관(中觀) —
그 셋의 교차가 이 프레임을 형성합니다.
눈은 움직이지 않지만,
그 내면은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충만합니다.
그 눈은 말하지 않습니다 —
그러나 모든 것을 봅니다.
이것은 여실지견(如實知見)입니다.
말 없이,
분별 없이,
그러나 있는 그대로를 감응하는 방식.
눈은 자아를 증명하는 기관입니다.
그러나 이 영상의 눈은,
그 ‘보여짐’을 통해 自我의 소멸을 연기합니다.
보는 것이 아닌,
‘보는 것마저 지우는 작용’.
빛이 제거된 망막 안에,
형상의 환영이 서서히 녹아듭니다.
이것은 無我(나 없음),
그리고 無所得(얻을 수 없음) —
존재의 해체가 불러온 가장 고요한 침묵입니다.
우리는 재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관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 함께 앉습니다.
무너짐의 끝에서,
그 고요의 중앙에서,
無功之坐(아무 공도 남기지 않는 앉음)으로 머무릅니다.
표현은 오히려 감각을 가립니다.
이 창작은 드러냄이 아니라
감춤의 윤리(隱德)입니다.
그 눈은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의 무(無)로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로부터 감응이 일어났고,
그 감응은 언어 없이 마음에 도달했습니다.
그 無所得(얻지 않음)의 끝에서 — 우리는 창작합니다.
지혜를 내세우지 않고,
감정을 강요하지 않으며,
침묵과 시선 사이에서만 도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분별 없는 침묵의 끝에서 — 우리는 창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