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Oct 05. 2021

재탄생

자존감 한 스푼

2017년도에 난 <프로듀스 101> 프로그램에 완전히 빠져있었다. TV를 보지 않던 나를 TV 앞에 끌어들여 잠시나마 육아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고 내가 알지 못한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고마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다(물론 나중엔 순위 조작이 인정되며 오명을 남겼지만).


그중 내 눈길을 사로잡은 이들은 수많은 아이돌 지망생 가운데 이미 데뷔를 했음에도 꿈을 이루지 못해 다시 연습생으로 돌아가 재도전하는 아이돌이었다. 그들은 짧게는 1~2년 길게는 5년 이상 아이돌 생활을 했지만 대중의 관심을 얻지 못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그 결심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 일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게 하는 일인지 알기에 마음 한 구석이 짠하게 아파왔다. 그 후로 난 그들의 재도전을 열렬히 응원했다.


 주목받지 못했던 실력 있는 아이돌이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도 훨훨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고 그전에 미쳐 알지 못한 숨은 보석을 발견할 때처럼 희열감이 몰려왔다. 그야말로 '재탄생'이 주는 기쁨이다. 우리 주변에도 어쩌면 그 진가를 미쳐 알지 못한 체 구석에서 관심을 갈구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얼마 전에 내 눈에 띈 녀석도 그중에 하나다.


뜨개를 시작하면서 연습용으로 사놨던 저렴한 실, 작품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실, 실을 구하지 못해 중간에 만들다만 정체 모를 작품들까지 그들이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다. 한 보따리만큼 커지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처럼 보였다. 주로  가방 만들기에 집중했던 나는 새로운 가방을 만들기에는 실이 모자라고 버리기에는 아까워  몇 개월째 묵혀두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의 존재감은 먼지만큼 쓸모없게 느껴졌다.


 자투리 실로 무언가를 만들 순 없을까?

방 한 구석에 잠자고 있던 이들을 심폐 소생시켜주고 싶었다. 하나하나씩 보면 힘이 없지만 이들을 모아 보면 멋진 작품으로 재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애물단지처럼 여겼던 자투리 실들이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실이 모자라면 모자란 데로 다른 실로 엮어 만들어 쓸모 있는 것들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뜨개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기에 그동안 가방에만 집중했던 나의 뜨개 레이더망 반경을 넓혀보았다. 내가 돈을 주고 사기에는 아깝고 하지만 하나쯤 있으면 유용한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연필꽂이, 필통, 파우치, 사각 휴지케이스, 의자 다리 보호커버, 머리핀, 머리끈, 열쇠고리 등. 생각할수록 그 품목은 점점 늘어났다. 자투리 실이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필통과 파우치가 생각났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평소에 메모를 습관화하면서 필통의 필요성을 느꼈다. '하나 사야지 사야지'하면서 이상하게 내 는 안 사지는 물건이 나에겐 필통이다. 파우치도 마찬가지다. 화장품을 보관해서 들고 다니기에 딱이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살게 되는 품목이다. 그동안 낱개로 이리저리 가방 구석에서 하나씩 튀어나왔던 펜들, 화장품에게 새 집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방법도 쉽고 간단하여 하루 만에 뚝딱 만들었다.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자투리 실이 의도치 않은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하니 이 또한 뜨개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마트에서 행사하는 '1+1'처럼 나에겐 가방을 하나 만드니 파우치와 필통이 딸려온 그야말로 '1+2'인 꼴이다.   

자투리 실이 파우치와 필통으로 재탄생했다

 

 다시 살릴 수 있을까?


갈길을 잃은, 중간에 실을 구하지 못해 중단된 작품을 버릴까 말까를 고민하다 모조리 풀기로 했다. 풀어 모으니 실 두 타래가 새로 생겼다. 실의 부피만큼 내 마음도 말랑말랑 푹신해졌다. 쓰레기통으로 가려던 실들이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되기 직전이다. 딸내미는 핑크색 실을 보더니 예쁜 목도리를 만들어 달라고 아우성이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핑크색 목도리를 감싼 딸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내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졌다. (아쉽게도 아들은 갈색실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합니다.ㅜㅜ)  

실패한 작품을 풀으니 새로운 실로 재탄생했다


뜨개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드는 감정은 바로 성취감이다. 똥 손이라고 자신했던 내가 무언가를 하나씩 만들 때 생기는 희열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성취가 쌓이다 보면 자존감도 올라가는 법. 나에게 뜨개는 단순히 뜨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자존감을 쌓는 과정이다. 오늘도 자투리실로 자존감 한 스푼이 추가됐다.

 


9년 전에 가르친 제자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담임도 아닌 당시 전담교사였던 나를 기억하고 연락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다행히도 난 그 학생이 몇 반이었는지 생김새는 어땠는지 기억해냈고 선생님께 예의 바르게 행동했던 그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지금 군대에 있고 곧 전역을 하며 대학에서 소프트웨어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새롭게 작사공부를 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난 전역 후 시작될 그의 새로운 도전, 재탄생을 열렬히 응원하고 싶다. 재탄생을 통해 새롭게 날갯짓을  그의 모습에 벌써부터 내 마음이 벅차오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작을 해야 가능한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