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May 24. 2021

흰머리의 습격

나이를 먹긴 먹나보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화장대에 앉아 긴 시간을 보내곤 한다. 화장을 하기 위해서도, 머리를 예쁘게 매만지기 위해서도 아니다. 바로 흰머리를 뽑기 위해서다. 둘째를 낳고 30대 후반부터 머리에 흰머리가 한두 개씩 보이기 시작했다. ‘새치겠지’라며 가뭄에 콩 나듯 나는 흰머리를 하나씩 뽑는 일은 재미가 상당했다. 오히려 보물 발견하듯 ‘어디 더 없나?’라는 마음으로 머리 앞, 옆을 이리 뒤지고 저리 뒤졌다. 그렇게 해서 한 가닥이라도 찾으면 작은 희열이 느껴졌다. 왠지 한가닥씩 뽑을 때마다 젊어지는 약을 한 스푼 먹은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 4년이 지난 지금은 한 번씩 머리를 쓸어 넘길 때마다 심상치 않게 흰머리가 보인다. 더 이상 보물 찾기가 아닌 해변에 흔해빠진 돌 찾기가 되었다. 희열이 아닌 서글픔이 몰려온다.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지금도 먹고 있구나.   


유난히도 까만 칠흑 같은 머리는 흰머리 찾기에 제격이다. 한 치의 갈색빛도 허락하지 않는 촌스러운 머리색이 이럴 때는 유용하다. 그리고 흰머리를 뽑을 때 없어서는 안 될 도구가 있다. 바로 족집게다. 목표로 지정된 머리카락 한 올을 세세하게 집어 올릴 때도, 막 자라기 시작한 짧은 흰머리를 정확하게 뽑을 때도 유용하다. 이를 활용하면 뿌리 속까지 깔끔하게 뽑아낼 수 있고 중간에 뽑다가 끊어질 리도 없다. 족집게는 겉으로나마 나를 젊어 보이게 하는 숨은 공신인 셈이다.


흰머리 뽑기 작업은 먼저 잘 보이는 앞쪽 머리부터 시작한다. 가장 처음 흰머리를 발견한 부분이기도 하고 뽑으면 같은 자리에 계속 나는 요주의 구역이다. 가르마를 이쪽저쪽으로 타고 머리를 양옆으로 꾹꾹 눌러 흰머리 뿌리를 찾아낸다. 앞쪽 공략이 끝나면 위쪽에서 양옆 쪽으로 타깃을 옮긴다. 거울에 최대한 잘 비치도록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그러는 사이 내 머리는 어느새 산발이 되고 이마에 새겨진 주름과 찌푸려진 미간은 덤으로 보인다. 주름이 생기는 일보다 보이지 않은 곳에 숨어 있는 흰머리를 제거하는 일이 내겐 더 중요했다. 이대로 끝내기 영 찝찝하면 남편을 소환한다. 머리 뒤쪽은 남편 몫이다.


“여보 나 흰머리 좀 뽑아줘.”

뒤쪽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가르던 남편이 한마디 던졌다.

“어우~ 뒤에는 흰머리가 많은데? 몇 개월 사이에 많아졌어.”

젠장. 내 눈길이 미쳐 닫지 않은 곳에 이미 녀석들이 많이 자란 모양이다. 너희들끼리 번식이라도 하는 거니? 뽑힌 흰머리가 어느새 서로 엉켜 쌓여 있었다. 


뽑은 흰머리를 관찰해봤다.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대부분 검은색이지만 뿌리끝에만 흰색으로 변한 머리카락, 새내기 흰머리다. 다음에 자라는 머리카락은 계속 흰머리 클럽에 포함될 확률이 높다. 다음은 기존 흰머리를 뽑은 자리에 새로 짧게 자란 흰머리, 흰머리 클럽의 창단 멤버이다. 창단 멤버답게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매달 참여한다. 아마도 검은 머리로 배신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마지막으로 길게 발견된 흰머리다. 미스터리다. 흰머리는 대부분 새로 나서 짧거나 뿌리 끝만 흰색인데 이 녀석들은 길게 자라 있다. 그전에 발견을 못 한 걸까 아니면 검은색이 알아서 흰색으로 변한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새로 흰머리 클럽에 가입하는 회원 수는 점점 늘고 있었다.     


어릴 적 엄마의 흰머리를 뽑아준 기억이 났다. 나는 바닥에 털썩 앉고 엄마는 내 무르팍에 머리를 기댄 채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그때 엄마 나이 40대 중반,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하다. 수북이 위로 솟은 까만색 파마 머릿속에서 흰머리를 이잡 듯 찾아냈다. 흰머리를 찾는 일은 꽤 재미있었다. 엄마와 스킨십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어서 더욱 소중했다.

“엄마 흰머리가 많이 늘었어. 엄마도 많이 늙었네”

“그래? 어떻게 하니? 40대부터  흰머리가 나면.”


 엄마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지금은 60대 중반인 엄마의 머리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다. 염색을 하지 않으면 영락없는 백발 할머니다. 나도 엄마와 같이 20년 후에 백발 할머니가 되는 길은 자명해 보인다.


5살 딸내미가 옆에서 흰머리를 뽑고 있는 엄마, 아빠를 보고 말했다.

“엄마 왜 흰머리 뽑아?”

“흰머리 안 뽑으면 엄마가 점점 할머니처럼 되거든.”

“난 엄마가 할머니 되는거 싫은데. 엄마, 할머니 되지 마.”

“엄마 할머니 되지 마?”

“응.”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라도 뭔가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서리태 콩가루라도 주문해봐야겠다.





이전 18화 밤에 가족에게 걸려온 전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