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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Apr 12. 2021

밤에 가족에게 걸려온 전화

하찮음의 소중함

“엄마, 할머니한테 전화 왔어”

샤워 중인 내게 갑자기 1호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엄마 거의 다했어.”


저녁을 먹은 후니 대략 7시쯤. 그럼 한국 시간은 밤 9시. 엄마가 주로 전화하는 시간이 아닌데? 엄마와는 보통 낮에 통화를 하고 저녁식사 준비하고 아이들 챙기는 이 시간에는 전화를 잘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지?’란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2호가 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엄마, 이모한테 전화 왔어.”

“어? 그래? 엄마 다했어. 곧 나가”


엄마에 이어 언니까지 연달아 전화가 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지?’란 생각은 어느새 ‘무슨 일이 생겼음에 틀림없어’로 바뀌었다. 가슴이 뛰고 손이 점점 떨려와 옷이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화장실에서 나와서도 ‘무슨 일이지? 무슨 일 생겼나? 왜 밤에 엄마와 언니가 연달아 전화를 하지?’라고 계속 생각했다.


 엄마, 아빠가 나이가 드실수록 가족에게 전화가 오면 불안한 마음이 든다. 특히 저녁이나 밤 시간에 전화가 오면 이 불안감은 증폭되어 나를 잡아 삼켜버릴 것 같다. 사실 엄마와 언니에게 전화가 왔을 때 ‘무슨 일이지?’ 했지만 나는 속으로 이미 나만의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있었다.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엄마에게 전화가 왔고, 그 소식을 들은 언니도 내게 전화를 했을 거라고.


 아빠는 올해 74세다. 6.25 전쟁 당시 3살이었던 꼬맹이가 어느덧 할아버지가 되었다.


“아빠는 6.25 전쟁 직후에 먹을 게 없어서 꿀꿀이 죽 먹고 그러고 자랐어.”


아빠는 역사책 속에서나 보던 근현대사를 몸소 체험하신 분이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 피난을 갔고 70-80년대 이룬 한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에서 중심축 역할을 했으며 IMF를 통해 인생의 쓴 맛을 제대로 경험하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년의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빠께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옆에서 듣던 엄마는 기분 나빠하셨다.


“60대가 무슨 할아버지야. 요즘 60대가 얼마나 젊다고! 자꾸 기분 나쁜 소리 하고 있어!”


 하지만 지금은 영락없이 70대 할아버지다.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니라 받아들여야만 하는 나이 70대. 어느 순간 머리는 하얗게 쇠고 이빨이 빠지고 허리는 구부정해 힘없고 가끔씩 정신이 다른 데 가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나이 듦이 이런 걸까? 거품이 물을 만나면 사그라져 없어지듯 노인이 되면 세월이란 풍파를 만나 모질게 마모되고 그 안에 가득 찼던 힘과 자신감도 같이 앗아 가나보다. 어느 순간 어깨를 한없이 움츠린 아빠가 보였다. 그런 아빠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는 아빠와 작별할 날이 오겠지. 그 순간만은 최대한 늦게 왔으면 좋겠다’고.


그 순간이 이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빨리 온 것 일까. 떨리는 마음으로 먼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안 받을수록 더 불안해졌다. ‘엠뷸런스를 타고 이동 중이라 못 받나?’ 생각하니 내 마음은 더욱 요동쳤다. 정신없는 와중에 계속하면 받을까? 연달아 3번을 걸었지만 엄마는 끝내 받지 않았다. 안 되겠다. 타깃을 바꾸자. 언니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보이스톡의 신호음은 유난히 경쾌하게 들린다. 내 속 마음도 모르고······. 내 마음도 몰라주는 이 소리를 누군가가 빨리 끊어주기를 바랐다. 제발 받아라, 받아라.


“여보세요?” 마침내 언니가 받았다.

“언니~ 무슨 일 있어?” 나도 모르게 다짜고짜 이 말부터 튀어나왔다.

“무슨 일?”

“나 샤워 중에 엄마도 전화 오고 언니도 전화 왔어.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 아무 일 없는데?”

언니는 아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을 아직 모르는 건가? 마냥 태연해 보였다.

“태윤이가 이제 잠에서 깨서 눈 떴을 때 보여주려고 전화했지.”

“아~그랬구나.”


나에겐 얼마 전에 예쁜 조카가 생겼다. 먹고 자고 하는 시기에 잘 노는 태윤이 얼굴을 언니는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이 말을 들으니 마음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졌지만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태윤이와 기분 좋은 통화를 마치고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받질 않는다. 아빠에게 걸어야겠다. 아빠가 받으면 그때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거다.


“여보세요?”

라는 아빠의 첫마디를 듣는 순간 내 마음의 무거운 짐은 눈 녹듯 사라졌다.

“아빠!”

“어, 미연아 잘 지냈어?”

“아빠 몸 괜찮아? 얼마 전에 허리 삐끗했다며” 난 일부러 걱정의 강도를 훨씬 낮춰 말했다. 생사의 여부에서 처음부터 단순히 허리 걱정을 했던 사람처럼.

 “지금 괜찮아. 침 계속 맞으니 걱정하지 마.”

“알았어. 아빠. 몸 관리 잘하고. 그런데 엄마는?”

“엄마는 지금 샤워 중이라 전화를 못 받은 모양이네.”

“엄마랑 따로 통화할게. 몸조심하세요.”


그다음 날 엄마에게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미연아 어제 시간이 그렇게 된 줄 몰랐네? 엄마 바닐라 오일 좀 쿠팡에서 주문해 달라고. 동네 마트에는 잘 없네.^^ ”


 엄마는 요즘 베이킹에 한창 빠져 계시다. 베이킹에 문외한 나는 빵에 넣으면 더 풍미 있고 맛있다는 바닐라 오일의 존재를 엄마를 통해 처음 알았다. 평소에는 귀찮다 생각했겠지만 전화의 목적이 바닐라 오일 주문이라니 안도의 한숨과 함께 웃음이 삐져나왔다. 내가 생각한 그 이유가 아니라서, 고작 그 이유 때문에 전화를 한 거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이렇게 하찮게 묻는 안부가 새삼 소중해졌다. 엄마에겐, 가족에겐 항상 이런 하찮은 전화만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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