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바보같이…
언덕을 오르는데 야외밴드 무대에서 박중훈이 불렀던 ‘비와 당신’노래가 흘러 나왔다. 노래가사 전반은 사랑을 흐느끼는 것이지만, 음율이 좋아 마지막 언덕을 오를 때 위안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고개마루 끝 무렵에서 ‘이제 괜찮은데~ 바보 같은 눈물이 날까’라는 가사가 귓전으로 들렸다. 나도 모르게 주루룩 눈물이 흘렀다. 달리면서 눈물을 흘려보긴 참.... 순간 ‘캔디’가 된 것 같은, ‘달려라 하니’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났다. 생각이 그곳에 머물자 주책없는 눈물은 빰을 타고 계속 흘러내렸다. 주위에 선수들이,갤러리들이 없었다면 펑펑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눈물이 앞을 가리다니… 묘한 감정이었다.
희뿌연 안개가 하늘을 막고, 건물의 아래층들 모두를 하얀 연기가 가려버린 늦가을의 아침이었다. 출발지점의 가로수 나뭇잎들은 힘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고, 잔가지들은 얇아진 팔을 애처롭게 벌리고 서있었다. 흐린 가을에는 편지를 쓰라는 노랬말도 있는데 그럴만한 감상은 이곳에선 사치스러 울 뿐이다. 창밖이 보이는 2층 커피숍도 아니었고, 차창을 비껴가는 가을의 환(幻)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회를 마치고 사진으로 본 대회장 풍경은 모래알을 실어나른 사막처럼 탁하게 보였다. 낙엽은 선수들이 뛰면서 부는 인위적인 바람에도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어느덧 생명을 가진 식물이 움츠러드는 날씨가 시작되고 있었다. 많은 선수들이 출전한 대회라 출발 축포가 울렸음에도 선수들은 뛰지 못하고 스타트라인까지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걸어야했다.
초반 컨디션이 아주 좋았다. 출발후 몇 km동안 몸이 안풀려 고전한 적이 많은데 오늘은 예상외였다. 초반기록을 보자면 출전한 대회중 제일 좋은 기록으로 달려나갔다. 그 가능성은 희망이 되어 의욕적인 뜀박질로 발전했다. 첫 5km는 SUB-3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고등학교 선배님이 앞서 나가지 말라고 경계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우중충한 아침이었지만 햇빛이 없는 오늘은 달리기에 좋은 날이다. 계절은 초록이 짙은 날에서 자꾸만 회색으로 변해간다. 산책하기는 불편해도 마라톤 하기에는 이런날씨는 참으로 적합하다.
중마코스는 20~30대 시절 많이 다녀본 곳이라 코스가 눈에 익었다. 언덕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내리막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훤했기 때문에 나름 힘 안배를 할 수 있었다. 언덕을 치고 올라갈때는 왼손을 규칙적으로 비틀기도 하고, 드럼을 치듯 팔목에 리듬을 주어 박자도 맞췄다. 그 덕분인지 언덕에서도 발이 무겁지 않았다.
수많은 선수들이 넓은 도로에 분산되면서 올림픽공원에 이르자 아주 한산한 주로가 되었다. 도로를 점거하고 달리는 것 만큼 짜릿한 기분도 없을 것이다. 코스 중간 중간에서 작년에 나를 추월했던 몇몇 선수들과 조우했다. 작년엔 그들에게 사정없이 추월을 당했는데, 오늘은 추월을 허용하지 않았다. 10km, 20km를 그렇게 달려나갔다. 더 힘을 쏟으면 빨리 달려갈 수 있지만 애써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서울비행장 주변으로 부대원들이 영외로 나와 열심히 응원해 주었다. 힘이 더 나는 것 같다. 시흥 사거리에서 여수대교 사거리를 꺽는데 몸이 하늘을 나는 듯 가벼웠다. 어느 선수가 서울공항쯤에서 내 속도가 오락가락 한다며 일정한 속도로 뛰어야 지치지 않는다고 일침을 가했다. 생면부지의 선수였지만 그 선수의 몸이 가벼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속도편차를 줄여 나갔다.
두팔이 없는 선수가 급수대가 아닌 곳에서 여인의 손에 의지해 종이컵에 담긴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신문기사를 본적이 있어 물을 건넨 사람이 아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아내가 아니었으면 그는 급수대에서 물한잔도 제대로 못마셨을 것이다.
이제 30km지점이다. 훈련을 많이 했어도 조금씩 거북스런 거리가 시작되었다. 언덕을 넘어 서울 비행장으로 향했고, 다시 언덕을 넘었다. 40km까지는 늦어도 3시간내에 들어와야 싱글을 할 수 있는데 체력은 자꾸만 고갈되었다. 대한도시가스 앞을 달려갈 땐 갈증이 심했다. 염치불구하고 처음 본 응원단에게 연거푸 물을 얻어 마셨다. 그러다 학여울역 언덕을 넘으면서 보컬리더가 부른 노랫말에 눈물을 찔끔하고 말았다.
삼전동을 지나자 골인지점이 얼마남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마라톤 경기라 골인지점은 모두 같았지만, 달리는 투지와 여력은 훈련량에 따라 많이 다른 것 같다. 이윽고 삿갓모자를 쓴 잠실 주 경기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죽을힘을 다해 빠르게 발을 놀렸다. 41km지점 3시간 7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운동장 트랙을 전력 질주하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숨막힐 지경이지만 예서 말 수는 없었다.
3시간 11분 52초.. 싱글은 못했지만 종전대회보다 6분을 앞당긴 개인 최고기록이다. 마라톤 입문 1년 8개월 동안 17번째 풀코스 완주를 마쳤다. 그동안 풀코스를 달리면서 생각하는 것과 느낌은 제각각 달랐다. 주로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성숙해지는 것 같다. 내가 달릴 수 있다는 것과, 스스로의 동력으로 비지땀을 흘렸다는 사실이 내겐 소중하다. 이번 대회를 통해 아버님을 생각했고, 훈련 소득도 얻었다. 그것이면 42.1295km에서 느낀 소득은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