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by 민경남

한낮 여름 볕은 8월의 느낌이었으나, 그늘 속 계절은 대체로 가을이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하늘이었고 태양은 추수를 앞둔 10월의 오후처럼 따갑다. 체육관역 3번 출구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느린 속도에 답답해하며 성큼성큼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편인데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다.


오후 4시 50분... 이른 시간이다. 체육관 주위는 아파트가 밀집해 있고, 길은 잘 닦인 신작로 마냥 반듯하다. 바닥에 하얀색 자전거 그림이 그려진 보행자 도로는 담배꽁초 하나 보이지 않는다. 슬쩍슬쩍 불어오는 바람은 단정하게 정리된 공원의 초록 나뭇잎을 이리저리 흔들어 놓는다.


체육관 입구는 인도에서 오른쪽으로 작은 언덕을 넘어야 보였다. 이곳에서 미리 예약한 콘서트 입장권과 음반 CD를 받았다. 아직 두어 시간이나 남았다. 일찍 오면 여유를 즐길 수 있다. 그를 만나는 시간까지 무엇을 해야 할까? 언덕을 내려와 체육관 옆 신호등을 건넜다. 건물 2층에 있는 '이바돔 감자탕'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감자탕을 먹고 싶다기보다 간판이 다른 그것들보다 지나치게 컸기 때문일 것이다.

등이 구부정하고 하얀 머리칼이 가득한 아줌마에게 야간봉을 구입했다. 아줌마는 두세번 거리를 배회하는 나에게 딴 데 가도 똑같다고 채근을 한다. 수완이 좋은 아줌마였다. 며칠 전부터 체육관 홈페이지와 주변 식당을 많이도 검색했다. 이제 온라인에서 검색했던 장소를 오프라인에서 확인하는 작업만이 남았을 뿐이다. 1,2층 식당도 둘러보고 고개를 들어 건물 위를 훑어보기도 했다. 아직 개점하지 않은 옷가게 검은색 유리문 앞에서 옷매 뭇새를 가다듬기도 했고 옆으로 서서 배를 밀어 넣어 보기도 했다. 살찐 몸을 보니 후회가 몰려온다. 번민일 뿐이라 체념하기로 했다. 누가 그랬던가? 체념은 행복에 이르는 첩경이라고.

그녀를 만나 무엇을 먹을까 많이 고민했다. 초밥을 파는 고급스런 인테리 풍의 레스토랑이 눈에 들어왔지만 술을 팔지 않는 것 같아 낙점하지 않았다. 술과 곁들인 가게들은 다 그렇고 그렇다. 그녀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는 술이 있어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첫사랑이라 그랬을 것이다.

30분 정도 식당을 둘러 봤지만 아~ 여기다,라고 무릎을 칠만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선택하기보다 그녀가 가고 싶은 식당을 가면 될 것이다. 체육관내 웨딩홀에 잠깐 들려 커피 자판기를 눌렀다. 벤치에 앉아 은은한 커피 맛을 즐겼다. 커피 향과 어우러진 늦은 바람은 산들산들 시원하다.

기다림은 설레임이다. 내가 마신 작은 종이컵 하나에도 애정이 간다. 만남의 장소인 3번 출구로 향했다. 그녀는 '네 지금 출발해요'라는 카톡을 5시 39분에 보냈다. 일곱 자 짧은 글이지만 긴 소설 문장을 읽는 것처럼 오래도록 쳐다봤다. 이제 30분 남짓...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내내 가슴만 콩당거린다. 긴장감과 표현 못할 그 느낌... 그녀를 기다리는 감정은 늘 이렇다. 어떨 땐 '입이 굳어 한마디도 못하면 어쩌지?'라는 괜한 걱정도 많이 했었다.

구둣발을 아스팔트에 툭툭차기도 하고 공원 벤치 주변을 맴돌기도 했다. 그런 긴장이 좋았다. 보고픈 사람을 기다릴 땐 대체로 이런 마음일 것이다. 만남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심장만 뛴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은 마치 미래의 사람들처럼 보인다. 에스컬레이터의 계단이 일자로 펼쳐지는 순간 사람들의 모습이 우주선에서 내리는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에스컬레이터에 누가 올라온다. 순간, 주위는 온통 광채로 번득인다. 마치 가수 이승철이 승강기를 타고 무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순간, 어찌하지 못할 관객들의 탄성과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녀를 만나기 전 서먹함을 피하기 위해 질문할 내용들을 미리 메모지에 적어 봤지만, 광채로 인해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다 까먹고 말았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배우 김미숙을 닮았다.

7시가 조금 넘자 오른쪽 대형 스크린에서 이름모를 여인이 등장하고 프러포즈 장소로 이동하면서 가수 이승철이 축하를 해주는 영상이 나온다. 남자의 꽃다발과 음악으로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모습... 저런 프러포즈에 안 넘어갈 여자는 없을 것이다. 스토리가 있는 신선한 기획이다. 경쾌한 음악이 공연장 전체에 울려 퍼진다. 이승철은 무대 아래에서 무대 위로 순간이동을 했다. 관객들의 환호와 탄성...

그만의 감미로운 노래와 귀에 익은 노래가 천지를 울린다. 그의 노래는 가나 초콜렛처럼 달콤하다. 자막에 비치는 가사는 애절하지만 익숙한 음률이라 흥얼거리게 되고 박수로 연호하게 된다. 이승철은 힘든 고음을 편안하게 소화한다. 대형 스크린에 비친 이승철은 쉴 새 없는 율동과 노래로 얼굴 전체에 땀 방울이 맺혀 있었다. 모두 서른한 곡을 불렀다. 관객들의 몸도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앞 좌석에 앉은 아줌마 한분은 두 시간 내내 율동과 박수, 스탠딩 춤과 곁들여 연신 오빠, 오빠를 외쳤지만 급기야 핸드폰을 의자에 놓고 가고 말았다. 수차례 앙코르송이 나올 무렵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수많은 관객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의 얼굴에는 상기되고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곱창을 좋아한다고 했고, 맥주 한병을 천천히 비었다. 나는 곱창 한 점에 소주 한잔, 두 잔을 비었다. 두서없이 얘기를 한 것 같고, 급하게 마신 술은 금세 취기가 돌았다. 저녁 11시 중반이 훌쩍 지나간다. 아쉬운 건 시간이다. 택시를 타고 떠난 그녀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이제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정말이지 모를 일이다..... 이승철의 노랫말처럼, 날 웃게 한 사람, 날 울게 한 사람...

25년 만에 잡았던 그 손은 오늘도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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