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머무는바람 Feb 15. 2022

3일 천하로 망한 첫 알바

학력고사가 끝났다.

친구와 나는 뭔가 어른스러운 일을 하고 싶었다.

딱히 학비를 벌려는 것도 아니었고 갖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저 어른들처럼 일을 하고 돈을 벌어보고 싶었다.

"우리 아르바이트를 해 볼까?"

친구의 말에 내 맘도 동하기 시작했다.

"근데 우리 아직 대학생도 아닌데 일 시켜주는 데가 있을까?"

미심쩍어하는 나에게 친구가 큰소리를 친다.

"야 원래 아르바이트는 대입 끝나고가 딱!이야.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

뭘 믿고 저러는 걸까? 그렇게 찾아간 곳은 중앙로 지하상가의 식당가.

"커피숍 아르바이트 같은 게 좋지 않을까?."

"친구야, 우리가 처음 하는 아르바이트인데 응?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면서 돈을 벌어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 응?"

그런 건가? 그래 어쨌든 나의 첫 사회생활이 될 테니까 힘들어도 열심히 해보는 의미가 크겠지.


그렇게 결기를 다진 우리는 운 좋게도 처음으로 들어간 식당에서 서빙 알바를 하게 되었다. 그것도 그날부터 당장!

사장 이모는 앞치마를 챙겨주며 서빙 요령을 번갯불에 콩 볶듯이 화르륵 알려 주고는 카운터에 자리 잡았다. 우리는 곧 '운 좋게도'라는 말은 그리 정확한 표현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주방 위쪽에 빼곡히 적혀 있는 저 많은 메뉴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한중일은 물론이고 국적조차 알 수 없는 저 메뉴들을 누가 다 시킨다는 건지.


"거기 학생 둘!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 이제 곧 점심시간인데. 손님들 많아질 거니까 정신 차리고."

"네? 아 네!"

얼굴이 날카롭게 생긴 직원들의 대장 이모의 말에 그제야 친구와 나는 앞치마에 머릿수건을 장착하고선 물컵의 위치며 쟁반, 물수건 등을 챙겼다. 아니나 다를까! 대장 이모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어디에서 준비~ 땅! 하고 오는 것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의 행렬.


"여기 주문받으세요."

"학생, 우리 물도 가져다줘야지."

"왜 이렇게 음식이 늦어요?"

"여기 자리 좀 치워주세요."

"밑반찬 좀 더 갖다 주세요."


"아 네, 네, 잠시만요, 네네네."


우격다짐 격의 서빙이었다. 쏟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길 정도로. 점심 손님이 뜸해지자 그제야 잠깐 자리에 앉아 쉴 수 있었다. 그때 대장 이모가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 와서 앉았다. 수고했다고 달래 주시려나? 괜찮다고 대답해 드려야지.

"학생들. 손님들 기다리지 않게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그렇게 설렁설렁하면 되겠어? 다른 이모들 하는 거 눈치껏 보면서 해야지. 학생들이 잘 움직여 주지 않으면 다른 이모들이 힘들다고 알겠어?"

머리가 등 울리는 것 같았다.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힘들지 않다고 이 정도는 괜찮다고 대답도 다 준비해 놨는데. 한껏 쪼그라든 우리는 얼마간 눈치를 보다 화장실로 나왔다.


잠깐 생각해 보니 스멀스멀 화딱지가 나기 시작하는 거다. 두 칸짜리 화장실에서 괜히 수돗물을 틀어 놓고 마음껏 화를 냈다.

"아니, 우리가 이 정도면 잘하고 있는 거 아니냐? 오늘 오자마자 바로 저렇게 일 시켜놓고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처음 하는 애들한테 어른이 그렇게 얘기하면 어쩌냐? 어휴..."

"그러니까. 말도 그렇게 밉게 하고 진짜 하나두 어른 같지 않다 뭐."

"그치? 그치? 칫 너무 했어."


그때 화장실 한 칸의 문이 열렸다. 순간 움찔, 그리고 다음 순간엔 마음이 쿵! 머리카락이 쭈뼛해진다. 화장실에서 나온 건 대장 이모였다.

"......"

"음. 이런 데서 남의 말하는 건 아니지. 어디 가서 그러면 안 되는 거다."

분명 화를 내는 건 아니었는데 대장 이모의 말이 대장 이모의 얼굴보다 더 날카롭게 마음에 찔렸다.


"하. 어쩌지?"

친구와 나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식당으로 갔다. 대장 이모의 눈치를 살피면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 첫날을 마치고 돌아오며 우리의 고민은 깊어졌다.

"우리, 그만둘까?"

"그러게. 근데 또 그렇게 그만두는 것도 좀 그렇고 참."


무거운 마음으로 다음날 식당엘 갔다. 대장 이모가 사장 이모랑 다른 이모들한테 우리를 뒷담화나 해대는 나쁜 애들이라고 얘기했을까? 대장 이모 눈치 보랴, 사장 이모 분위기 살피랴, 다른 이모들의 표정 탐색하랴, 점심시간이 하나도 안 힘들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는 여지없이 불편한 마음을 안고 와야 했다.


버텨보자며 3일째 출근한 날, 대장 이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친구와 나는 급하게 의논한 끝에 그날 그만두기로 했다. 더 이상 대장 이모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왜 그만두려고? 일주일만 하면 금방 익숙해질 텐데."

사장 이모의 반응을 보니 대장 이모가 우리의 뒷담화를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우리가 익숙하지 못해 힘들어서 그만두노라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3일간의 첫 알바는 끝이 났다.


지금도 남의 뒷담화를 하다가 보기 좋게 걸려서 응징당하는 드라마의 장면을 볼 때면 그때의 그 얼굴 화끈거림이 반사적으로 재현된다. 자기 전에라도 또 생각날라치면 거침없는 이불 킥으로 그날의 부끄러움을 대신한다. 첫 알바의 날카로운 첫 깨우침은 30년의 시간 속에서도 생생하게 함께 하고 있다. 선생님이 된 친구는 또 어린 제자들에게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진심으로 가르치고 있겠지?

뒷담화로 아르바이트가 끝났으니 다행이지, 그때 그 경험이 없었다면 가벼운 입놀림으로 더 큰 무언가를 끝장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음. 이런 데서 남의 말하는 건 아니지. 어디 가서 그러면 안 되는 거다."

얼굴도 말도 가르침도 날카로웠던 대장 이모는 어쩌면 괜찮은 어른이었는지 모른다. 죄송했노라 정식으로 사과하고 그만두었더라면 조금은 덜 이불 킥을 날렸을 텐데. 그래도 대장 이모 덕분에 덜 부끄러운 어른이 된 건 아닐까?


귀가 간지럽다. 누가 나의 뒷담화를 하는가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돌연 작가님이 사라졌습니다ㅠ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