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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무는바람 Feb 24. 2022

욕심도 병인 양 하여

-새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도착 알람에 메일을 확인하러 들어갔다가 화들짝 놀랐다. 은하철도 999도 아니고 메일함 옆을 지키고 있는 숫자 999+! 이건 단순히 게으름만의 문제는 아니다. 나는 이미 지난 메일도 휴지통으로 쉽게 보내지 못한다. 그중에 나중에라도 필요할 것 같다는 조바심에 내게 쓴 편지함에 혹은 지난 메일함에 차곡차곡 쟁여 놓는 습관이 있다. 어지간해서는 참 고치기 힘든 묘한 습관이다. 


 메일만이 아니다. 핸드폰 속 갤러리에는 또 똑같이 찍힌 사진들도 삭제하지 못하고 저장 공간을 잡아먹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 똑같은 사진들에 도대체 무슨 다른 점이 있는가 여기며 틀린 그림 찾기 하듯 뜯어보곤 하다가 허탈감에 빠지곤 한다. 그래도 메일이나 사진 정도면 그나마 괜찮다. 


 이런 과한 욕심이 사람에게 적용되면 그건 참 나에게나 상대방에게나 몹쓸 일이 되어버린다. 상대를 100% 장악해야만, 그래서 서로 틈 하나 없이 밀착된 관계여야 찐 절친인 것 같은 만족감을 느끼던 때가 있었다. 시간이든 일이든 무엇이든 공유해야만 직성이 풀리던 그런 때. 한참은 그런 관계도 괜찮았다. 문제는 그 뒤부터였다. 서로에게 틈이 없으니 갑갑해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좋을 땐 그 갑갑함도 참을 만하지만 조금이라도 섭섭함이 끼어든다면 이제 내 마음이 지옥이 된다. 작은 것 하나하나 섭섭하지 않은 게 없다. 그렇게 마음은 깊은 오해의 늪으로 쉽게 빠져들고 웬만해선 다시 나오기 힘들다. 그렇게 둘도 없는 사람이라 여기던 절친들과 소원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시행착오를 거치고서야 깨닫는다. 무엇보다도 사람 관계에 사이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와 상대방 사이, 시인 칼릴 지브란이 말한 것처럼 하늘 바람이 춤추고 바다가 출렁일 수 있는 그런 틈이 놓여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사이좋다’라는 말이 생겼으리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적정한 ‘좋은 사이’를 찾아내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 그렇게 그 혹은 그녀에 대한 심적, 물리적 '사이' 욕심을 비우며 이렇게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다시 위기가 몰려오고 있다. 당장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소소하게 이런저런 채소를 가꾸시는 한 귀퉁이 작은 땅에 집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다. 시작은 분명 아이들이 독립한 후가 될 것이니 남편과 둘이 지낼 수 있는 단출한 1층 집이었다. 그러다 어느 한 날 명절이면 아이들도 내려오고 지인들도 머물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끙끙 고민하다가 결국 뚝딱 2층을 올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주차장이 있어야 하니 주차장 위 공간을 활용하여 2층으로 연결된 나만의 북 카페 같은 공간은 어떨까 하는 설레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또 한 층을 세운다. 놀라지 마시라. 현재 상상 속 그 집은 엘리베이터가 장착된 층고 높은 4층 빌딩 상태가 되어 있다. 이 기세라면 그 끝은 내가 감당하기 힘든 정도가 될 일이 틀림없다. 


 욕심은 버리는 게 아니라 다스리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의 과하게 넘치는 이 마음의 욕심은 먼저 조금 비워야 다스리기가 가능할 것 같다. 일단 오늘 빌딩의 엘리베이터를 비워보자.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노년을 보낼 집이니 오르고 내릴 현실적인 이유로라도 한 층 한 층 낮아지지 않겠는가? 내일은 무엇을 비울지 아쉬움 속에 고민을 해 본다. 


 사람도 집도 하다못해 메일이나 사진도 온전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첫걸음, 날마다 날마다 나를, 내 욕심을 비우고 다스리기에 진심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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