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내 손은 여기 손금이 다 이어져 있어요."
둘째 아들이 신기한 듯이 오른쪽 손바닥을 내밀며 바싹 다가앉는다. 어쩌다 친구들과 손바닥 안에 별 모양을 찾아보자고, M자도 찾을 수 있다고 유심히들 보다가 둘째의 일자 손금이 단연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녀석, 그게 신기하단 말이지? 네 어미의 손금을 보여주마.
"엄마 손금을 볼 텐가."
의기양양해진 나는 장풍이라도 쏠 듯이 위풍당당하게 두 손바닥을 척 펼쳐 보였다. 양 손바닥을 나란히 펴니 가로지르는 손금이 마치 고속도로 길 마냥 시원하게 한 줄로 이어진다.
"오~ 엄마는 양손이 다 일자네."
둘째의 탄성이 함께 손바닥 위를 내달린다.
나는 막쥔손금이다. 그것도 양손 모두.
어릴 때 친구들은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내 손금을 특별한 듯 부러워했고 지나가던 어른들은 아이들 노는 데 끼어들어 내 손금 풀이를 해주기도 하였다. 막쥔손금이 매우 희귀한 손금이라는 것, 양손 모두 막쥔손금은 더더욱 흔치 않다는 것, 그래서 대박 날 운명이라는 것. 정확히는 대박 아니면 쪽박의 극과 극 운명을 지닌 손금 풀이었지만 내 좋을 대로 대박 운명으로만 기억하기로 한 듯한 의심이 크다. 멋모르는 어린 때였지만 그 손금 풀이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대박 운명을 움켜쥔 내 손이 기특하고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면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가끔씩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위로를 받을 때도 적지 않았다. 뭔가 막막한 때에도 물끄러미 손금을 내려다보며 괜한 안도감을 장착하기도 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에 마음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일이 꼬일 대로 꼬여도 결국엔 잘 풀릴 것이라는 기도 같은 느긋함도 어느 정도 막쥔손금의 후광을 입었을 거다.
그렇게 50년, 막쥔손금 여인의 대박은 여전히 실현 기미가 보이지 않고 대박의 꿈도 시들해져 간다. 50을 넘어 서면서는 내가 이룬 게 뭐가 있나 헛헛한 마음이 드는 때도 다반사다. 그저 인생이 큰 기복 없이 밋밋해서 내 삶의 맛도 그냥 슴슴하구나 싶기도 하다. 그럴 때면 또 슬쩍 맡겨둔 요술주머니라도 되는 양 손바닥을 훑어보다가 괜히 홀로 민망해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오른손 막쥔손금이 조금 *토다져 보인다. 설문대할망의 터진 치마 구멍 사이로 새어나간 흙처럼 대박의 운을 저 *토다진 손금 사이로 흘려버린 건 아닐까 짐짓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움켜쥐기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 은근슬쩍 내려놓고 비워내며 만나는 헐렁헐렁한 삶의 여백이 또 오름처럼 그 풍경을 자랑할 것을 안다. 비록 지금은 무엇을 더 움켜쥐었는지 알 수 없으나 다른 게 아닌 내 손을 믿고 자잘한 삶이라도 이만큼 건사해 온 것이 쪽박은 아니리라 하는 건 지나친 위로일까.
가끔은 내 손도 아들의 빛나는 탄성을 가져오는 대박일 때가 있다.
*토다지다:(제주어)물건 등이 찔끔찔끔 뜯기다